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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연 보는 휘 Mar 06. 2020

2019-2020 동아시아계 미국 연극 뮤지컬 리뷰

Soft Power, Endlings, and Suicide Forest

    어쩌다 보니 매주 두 편씩 공연을 몰아치면서 본 근 한 달. 귀국 걱정에 (5월인데 갈 수 있을까?) 봄 학기 첫 한 달 적응에 여러모로 정신이 없어서 업데이트를 못했다. 우연히도 저번 주는 셀린 송, 오카다 토시키, 하루나 리에 테라야마 슈지까지 여러모로 동아시아계 연극을 연속으로 접한 주다. 주변에서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냐고 물을 정도인데 정말 우연임! 그래도 아무래도 반복적으로 보다 보니 몇 마디 얹어보고 싶어져서, 이번 포스트에서는 뉴욕에 오고 나서 본 동아시아계 미국인(+캐나다인) 극작가의 극 세 편에 대한 리뷰를 남겨보고자 한다.






David Henry Hwang's <Soft Power> (2019)

The Public Theater

New York Premiere Musical
Play & Lyrics by David Henry Hwang    

Music & Additional Lyrics by Jeanine Tesori (뮤지컬 <Fun Home>의 작곡가!)

Choreography by Sam Pinkleton

Directed by Leigh Silverman


https://youtu.be/QyRbZYpoKhY


<엠 버터플라이>의 극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의 신작 뮤지컬이라는 소식에 달려가서 본 뮤지컬. 게다가 힐러리 역을 제외하고는 올 아시아계 배우라니...! 흔치 않은 극이라 냉큼 퍼블릭 시어터로 향했다. 


극 중, 데이비드 헨리 황은 중국에서 뮤지컬 제작 의뢰를 받게 된다. 아버지의 고향, 익숙하지 않은 중국 상하이의 땅을 밟은 황. 황은 뮤지컬 제작자 슈에 싱에게서 아버지의 중국을 배우며 가까워진다. 슈에 싱은 황에게 <왕과 나>처럼 "미국스러운" 뮤지컬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장바구니를 든 채 고민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황은 괴한의 칼에 목이 찔리고 만다. (실제로 황은 칼에 찔리는 혐오 범죄를 당한 적이 있다.) 이 맥락에서, 이 극은 황이 스스로 겪었던 혐오 범죄에 대한 소화과정이자 대항과정이 된다. 혼수상태 속에서 황은 극중밖 주변 인물을 캐스팅하여 극중극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진행한다. 황이 꾸는 꿈속의 슈에 싱은 선거 운동을 하던 힐러리를 우연히 만나 중국의 입장에서 미국의 정치에 대해 논하게 된다. 슈에 싱과 힐러리의 관계는 연애 감정으로 발전하고, 대선에서 패한 힐러리는 슈에 싱에게 정치적 가르침을 청한다. 


오리엔탈리즘으로 악명 높은 뮤지컬 <왕과 나>의 미러링 극으로, 중국의 시선에서 미국 민주주의 모순을 풍자하는 셈. <Yellow Face>, <M Butterfly>의 극작가답게 오리엔탈리즘/아시안 재현 미러링은 정말 황이 달인이다 싶다. 한 넘버 통째로 성조와 이름(슈에 싱)을 가르쳐주는 넘버라니. 뮤지컬 자체도 의도적으로 미국 브로드웨이의 문법을 여실히 따른다.


그런 패러디적 분위기는 1막 끝에 위협스러우리만큼 뒤집힌다. 1막 끝, 미국 대통령으로 트럼프가 당선되고, 극장의 앞 뒤 온 문을 열고 밀려들어온 트럼프 지지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객석과 무대를 활개 한다. 집회는 과열되고, 그들은 나도 미국인이라며 진정하라는 황의 목을 그대로 칼로 긋는다. 황은 쓰러져서 "I’m a fake"라 노래하고, 황을 돌보러 달려온 슈에 싱과의 듀엣에서 가사는 점차 "I’m both, I’m whole"로 바뀌어간다. 피 흘리는 황 뒤로 트럼프 지지자들은 뮤지컬 <해밀턴> 포스터의 아이코닉한 자세를 취한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한 손에 총 높이 들고 줄지어 해밀턴 자세를 하고 있는 게 참 많은 걸 함축하는 장면. 실제로 <해밀턴>은 이민자 알렉산더 해밀턴을 전면적으로 다룬 극이나 NYTW에서 브로드웨이로 옮기며+토니상 수상으로 표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관객층이 보수화된 경향을 띤다. "Immigrants, we get the job done"이라는 아이코닉한 대사에서 나오는 박수갈채도 나날이 줄어든다는 평.)  


이 극이 단순한 미러링에 그치지 않고 서사의 깊이감을 찾는 이유는 황이 미국을 풍자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희망을 찾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예로, 1막에서 힐러리는 "나는 선거에서 패했지만 미국과 중국의 가치는 서로 다르다. 나는 아직 민주주의를 믿는다"는 빅 넘버를 부른다. (레미즈로 따지면 On My Own 수준의 잊힐 수가 없을 정도의 원탑 빅 넘버.) 그 빅 넘버는 백인 분장을 하고 있던 아시안 아메리칸 캐스트들이 2막 엔딩에서 분장을 벗고 한 줄로 늘어서 이 넘버의 마지막 부분을 부르며 리프라이즈 된다. "나는 미국인이고, 아직 민주주의를 믿는다"는 가사. 


이 장면에서 아직 편견에 머무르던 관객들은 다시 한번 뒤통수를 맞게 된다. 많은 기자들이 황에게 던졌던 질문과 달리, 이 뮤지컬이 "동양-서양"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뮤지컬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장면이기 때문. 우리/너의 문제가 아니다, '너'로 상정되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사실 '우리' 미국의 일부라는 점을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라 황이 절절히 알리는 넘버인 것이다. 넘버의 후렴구 "in America"는 1막 엔딩에서 혐오범죄를 당해 쓰러진 황에게 슈에 싱이 몇 번이고 건넨 중국의 격언 "살아만 있으면 good fortune은 찾아온다"는 가사와 어우러지며 <Soft Power>의 마지막 메시지로 남는다. 


시니컬한 황의 미러링 뒤에 찾아드는 가사의 절실한 울림이 진하게 남는다. 차별과 혐오가 판치는 세상에서 살아만 있다면 좋은 운명이 찾아올 것이란 게 얼마나 눈물 나는 말인지. 









Celine Song's <Endlings> (2020)

New York Theatre Workshop (NYTW)

By Celine Song
Directed by Sammi Cannold


https://www.youtube.com/watch?v=cj0NPIqsp8Q


한국계 캐나다인 극작가 Celine Song이 만재 해녀 이야기를 무대 위에 (물탱크와) 올린다는 소식에 보러 갔는데 기대보다 훨씬 좋았던 작품.


전반부는 만재 섬에 딱 셋 남은 해녀들의 이야기를 감성적으로 풀어낸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서로 의지하고, 가족을 위해 그리움을 삼켜내고, 그럼에도 생계를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해녀들. 어찌 보면 전형적일 수 있는 서사지만 극작가 Celine Song이 해설자로 끼어들면서 극에 다른 한 겹이 겹쳐진다.


송은 한국계 캐나다인 극작가로서 백인 중심적 시장에 스스로의 피부색까지 재화로 만들어 팔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한다. 이민자로서 당사자의 정치성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 해녀들의 이야기를 단지 나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이유만으로 도맡아서 백인 중심적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가? 당장 나는 집세를 내야 하고 내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데, 이 시장에서 나는 나의 무엇을 팔 수 있는가? 정말 “백인스러운” 콘텐츠를 내는 것? 혹은 나의 뿌리를 “파는” 것? 단순히 흑백 너 나가 아닌 문제에 대해 <Endlings>는 파고든다.


<Endlings>의 흥미로운 지점은 신자유주의 시장에서 뉴욕의 셀린 송의 성공에 대한 열망을 만재 해녀들의 열망과 연결 짓는다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것, 돈을 만지는 것, 섬을 떠나는 것, 그리고 바닷속에서 욕심을 내는 것에 대해. 나의 이야기에 대한 열망, 경제적 성공에 대한 열망, 공간에 대한 열망을 한 선 상에 놓는 것이 효과적이었음. 이 연장선에서 기억에 남는 건 마지막 송의 모놀로그다. 내 신체 일부 하나하나가 뉴욕시 구석구석 모두 닿을 때까지 내 몸을 늘려 뒤덮고 싶다던. 그것도 모잘라 세계를 덮고 싶다던 포부. 


그리고 뉴욕에 사는 송이 태어나지도 (그리고 착상하지도) 않은 아이에게 하는 이야기와 이미 하늘에 있는 송의 할머니가 송에게 하는 모놀로그는 평행선처럼 보이지만 서로 사실 얼마나 같은 선상의 말인가 생각이 든다. 만재 해녀 이야기의 당사자성에 대해 고민하던 송에게 송의 할머니가 너도 나의 이야기를 갖지만(사용하지만) 나도 너의 이야기를 갖는다(사용한다). 계속 이어가라, 더 성공해라, 더 성공해서 나의 이야기를 전해라 라고 하는 부분이 사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얼마나 절실하고 힘 있는 말인지에 대한 생각도. 









Haruna Lee's <Suicide Forest> (2020)

Ma-yi Theater Company

By Haruna Lee
Directed by Aya Ogawa


https://www.youtube.com/watch?v=AeRQf4NwMVs


일본(+대만)계 미국인 작가의 시선에서 서술해내는 극. 어린 시절 시애틀에 이주해온 하루나(작가 본인)가 스스로에게 끈덕지게 들러붙는 자기혐오와 마주한다. 그 대면은 일본문화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 자신을 속박했던 것들, 자신이 혐오했던 것들의 캐리커쳐로 그려진다. 캐리커쳐와 더불어 일본의 미소지니, 에이지즘, 수직적 권력관계, 집단 따돌림, 전체주의 등이 파편적으로 무대 위에 흩뿌려진다. 


이 모든 것은 작가 하루나의 시선에서 응시되기 때문에 지극히 위협적이고 폭력적이다. 일본의 엄마와 중간의 자신, 두 다른 종류의 유령이 한 집에 살아왔다는 하루나의 대사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좌절과 분노에 가깝다. 그리고 나와 다른,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본”은 숲 속의 동물 탈들, 하루나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을 거는 존재들로 등장한다. 하지만 하루나가 이해할 수 없던 존재들은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하루나를 보듬어주는 존재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건, 작은 어머니의 유령으로 그려지는 문화의 유산에 대한 하루나의 다층적 감정. 하루나의 엄마 아오이는 붉은 유카타를 입고 검은 머리를 산발한 채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아마 엄마를 이해할 수 없던 하루나의 시선에는 아오이가 저리 집을 돌아다니는 과거의 유령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하루나의 엄마는 실제 하루나의 엄마이며 일본의 시체 연극 부토 무용수.)


관객에게 엄마를 소개하며, 딸과 엄마 간의 애틋한 교류를 보여주던 장면은 하루나가 어릴 적의 상처를 질문으로 되돌리며 깨진다. 질문은 창처럼 아오이를 찌르고, 아오이는 부토를 추며 바닥을 구른다. 이 아픔은 나의 아픔이 아니라 엄마의 아픔이며, 엄마의 아픔을 전가하지 말고 나를 놓아달라는 하루나의 노래. 일본어를 하는 아오이는 이제 언어를 잃는다. 자신을 끈덕지게 옭아매는 아오이를 밀쳐내고, 하루나는 무대로부터 도망친다. 그리고 아오이는 딸에게 그렇게 도망치라 소리쳤던 무대에서 정작 자신은 도망치지 못한 채, 무대에 홀로 남아 갇히고 만다.


웬만하면 연극 보고 힘들거나 트리거가 눌리는 편은 아닌데, 이 연극은 숨을 편히 쉬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연극이었다. 몇 번이고 벌떡 일어나서 이 극장에서 나가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마치 하루나처럼. 하루나의 자기 고백과 배우들이 스스로의 일본성에 대해 자기 서술을 하는 장면이 없었더라면 더욱 괴로웠을 것 같다. 동기는 신변잡기적이라 작가로서 실망스럽다고 했던 구간이었지만 내겐 오히려 therapy 세션처럼 느껴졌다. 마치 <Slave Play> 2막이라고 해야 하나.








이번 2019 하반기-2020 상반기에 내가 관람한 동아시아계 미국인(+캐나다인) 극작가의 세 작품은 극작가가 서사에 인물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authorship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되고. 특히 셀린 송과 하루나 리는 무대 안과 밖, 객석과 무대의 경계까지 넘나들 정도로 무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어지른다. 무엇이 그들을 무대로까지 불러들인 것일지, 그리고 무대를 통해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게 한 것일지. 


Urayoán Noel이 저서  In Visible Movement: Nuyorican Poetry from the Sixties to Slam 에서 푸에르토 리코 계 뉴욕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Interzone 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다. 극작가 Piñero는 자신의 작품이 로어 이스트사이드의 Interzone의 안(in)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Interzone에 대한 (about) 것도 아니며, Interzone으로부터(from) 나왔다 이야기한다. 국가가 통제할 수 없었던 무법지대였던 인터존은 그 덕에 국제적인 허브가 되었고, 더 나아가 미국에도 푸에트로 리코에도 속하지 않다 느꼈던 푸에트로 리코 계 미국인 예술가들이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Nuyorican (New York + Puerto Rican)으로서 두 다른 면을 부딪혀가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겠지만, 비슷한 선상에서 무대 역시 Interzone이 될 수 있는지 상상해본다. 현실의 법칙이 통제하지 못하는 무대, 미국에도 한국/중국/일본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다 느끼지 못하는 극작가들이 스스로의 두 면을 부딪혀가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탐색할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으로부터 벼려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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