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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연 보는 휘 Apr 03. 2020

방구석 극장 1열

자가격리 상태의 공연예술: 노동, 극장의 범위 그리고 관객성


뉴욕의 전 도시적 셧다운 4주 차, 뉴욕의 연극 연구자들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주제는 "자가격리 상태에서 공연예술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일 것이다. 한 칸 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금,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도 손쉽게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접하고 있지 않나 싶다. 넷플릭스의 영화/드라마 영상예술이든 스포티파이의 음악예술이든, 미술관의 온라인 전시회이든, 너무 많아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공연예술 스트리밍이든.


사실 너무나 가변적인 상황이기에 뚜렷한 통찰을 하기엔 힘들어 보인다. 적어도 내겐 그저 많은 질문들이 부침할 뿐이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가장 두드린 건 노동, 극장의 범위 그리고 관객성 (spectatorship)이다. 하단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음속 질문과 감상이나마 공유한다.




노동


1) 서울시에서 내려온 공문에 대한 온라인 담론에서 브로드웨이의 셧다운과 대학로의 셧다운을 동일선상에 두고 논의한 덧글을 보았다. 그래서 부족한 지식으로나마 나름의 코멘트를 남긴다.


2) 브로드웨이의 셧다운과 대학로 셧다운은 맥락과 배경에서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브로드웨이는 상설/롱 러닝 공연이며 수입의 큰 비중을 관광객이 차지하고, 투자와 수익 금액의 단위부터가 다르다. 대학로는 상설공연도 있으나 보통 시즌제이고, 수입의 큰 비중을 마니아층이 차지한다. 또한 브로드웨이의 경우,  Actors' Equity 등 이 재정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중재해주고 있으며  해밀턴의 린마누엘 미란다와 같은 브로드웨이 스타들이 펀드레이징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The Tonight Show: At Home Edition (Lin-Manuel Miranda))


오히려 오프 브로드웨이나 다운타운 쪽의 상황이 대학로와 비슷할 수 있겠으나, La Mama, Pan Asian Repertory Theater, NYTW 등의 오프 브로드웨이나 다운타운 극단들은 제작비의 상당을 정기적 기부 혹은 유료 회원제(subscription)에 의존한다. 우리나라 연극계 역시 서울예술단, 연극열전 등의 극단들이 유료 회원제를 시행하고 있으나, 회원제의 금액 단위가 크게 다르다. 


또한 연극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 관심 정도가 다른 점도 있다. 뉴욕과 서울 연극계 양쪽 다 긴급 재정지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아나, 극장 셧다운을 할 시 타격의 정도나 상황이 크게 다를 듯하다.


3)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연극을 진행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직업군도 부담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연극만 특별대우를 해달라 요구하는 것 역시 아니다. 시민, 관객과 연극 종사자의 안전을 위해 연극이 중단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이는 이 상황 속에서, 예술이 곧 노동인 연극계 종사자들의 생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연극과 노동은 사실 내 연구분야가 아니라서 더 잘 아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극장과 관객성


1) 많은 극단이 다양한 이유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국립이나 공립 단체들은 문화복지를 위해 레퍼토리 영상을 제공하고, 소규모 극단들은 이미 준비했던 공연을 관객에게 선보이고자 어쩔 수 없이 스트리밍을 진행하기도 한다. 영국 국립극장은 라이브를 통해 모금을 진행 중이다.


2) 오늘 수업에 방문한 Julia L. Foulkes 교수에게 현 상황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의 범위에 대한 질문을 했었다. (New School에 재직 중인 Julia L. Foulkes 교수는 문화역사가로서, 신자유주의 논리 하 도시공간에서의 극장과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논문을 출판한 바 있다. 더 상세한 내용은 "Streets and Stages: Urban Renewal and the Arts after World War II" 참조.) 요즘과 같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스트리밍으로 공연예술을 접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극장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둘 수 있는가? 극장이라는 범주는 건물, 그 앞의 광장, 근처의 거리 혹은 가상공간으로까지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젠트리피케이션 등 신자유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극장(대표적 예: 링컨센터/예술의 전당)이라는 공간이 대중과 더 맞닿을 수 있을까? 혹은 반대로, 극장경영이 선정하는 한정된 레퍼토리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가?


3) 이 질문에 Foulkes 교수가 남긴 답 중 와닿았던 코멘트는 "가상공간의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극장에서 만날 수 있던 낯선 사람들이 몹시 그립다"는 감상이었다. 극장을 자주 다닐 때는 거슬리곤 했던 껌 씹는 소리와 전화벨소리 그런 사소한 것마저 그립다고. 이 솔직한 코멘트가 그동안은 생각해본 적 없던 대중으로서의 관객의 가시화에 대한 생각을 이끌었다. 비록 유튜브 라이브 스트리밍 등에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수많은 코멘트, 트윗, 해시태그 체인, 라이브 관람 자수 등을 통해 가상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관객들은 느낄지라도, 나 역시 관객의 얼굴이 그립다. 실제로 바라볼 수 있는 관객과, 바라보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는 덩어리로서의 관객을 어서 만나고 싶다. 나도 극장이 몹시 그립다. 낯선 사람으로서의 관객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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