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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May 23. 2020

운 좋은 대학생의 ‘자본주의적 낭만’ 부수기

“이번 등록금은 네가 내야겠다.”

"이번 등록금은 네가 내야겠다.”


분명 교수님들께 한 학기 중도 휴학, 아니, 중도포기 메일을 보내던 날 떠올렸던 여러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였는데도, 대학을 다니는 4년 내내 묵묵히 등록금을 내주셨던 부모님의 입에서 저 말이 나왔을 때의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 학기 등록금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니.

 

아무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들, 등록금을 포기하되 성적은 지킬 수 있었을 중도 휴학 대신 그때까지의 내 시간, 노력, 중간성적은 물론이고 평균 평점까지 엉망으로 만들 ‘중도포기’를 선택한 것은 나였다. 그렇기에 공식적으로는 4학년 2학기까지 마치고도 학교를 1년은 더 다녀야 졸업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추가학기 등록금을 스스로 마련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마 내 형편없는 평점 상태를 제대로 인식한 2학년 말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최소한 선택에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공부는 팽개쳐둔 채 동아리를 하겠다고 1년을 제멋대로 휴학해버리고, 2년간 동아리 회장을 했을 때도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자취방 월세와 생활비를 보내주셨던 부모님이다. 내가 선택한 그 시간의 결과가 동아리에서 손을 떼고 몇 년이 지나서야 ‘한 학기 등록금 마련하기’라는 과제로 돌아온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할까, 너무하다며 입술을 내밀어야 할까? 부모님께 저 말을 들은 직후에 나온 반응은 후자였지만, 지금은 전자로 기울고 있다.



꿈꾸던 대학의 합격통지서를 받고 상경한 나는 전공 공부에 매진하는 대신 학내 중앙동아리에 모든 것을 쏟았었다. 1학년, 2학년, 휴학 1년까지 총 3년을 동아리에 바쳤고, 뒤늦게야 전공과 관련된 유학이 가고 싶어 3학년 때는 부족한 평점을 메꾸기 위한 공부를 했다. 유학 준비를 위해 한 학기를 휴학했고, 예정과는 달리 1년간 유학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귀국 후 바로 복학한 4학년 2학기를 ‘중도포기’했다. 중도 휴학이 아니다. 그 증거로 4학년 2학기 성적표에는 F가 한가득이다. 도합 6년의, 심지어 아직 ‘졸업’으로 마무리되지도 않은 내 대학 생활 6년에 어떤 성적을 매길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기준으로 보자면 아마 D-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아니지, 마무리도 못했으니 성적을 부여받을 자격 자체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복학을 3개월 앞두고 ‘다음 학기 등록금 마련하기’라는 과제를 받은 지금 이마를 짚으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내 마음은 생각보다 우울하지 않다. 단지 등록금 저축을 위해 요 몇 달간 몸을 담그고 있던 ‘자본주의적 낭만’을 부수어야 한다는 점이 상당히 아쉬울 뿐이다. 그래서 이 아쉬움이 촉발한 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자 오랜만에 글을 쓰고 있다. 이러려고 시작한 브런치가 아니지만 일기에 쓰기에는 긴 단상을 브런치에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도움이 될 게 아닌가.



F 폭격을 맞고 낙향한 주제에 ‘자본주의적 낭만’에 젖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인복 덕분이었다. 학기를 포기해 성적과 등록금을 동시에 날렸음에도 그대로 서울에 머무르며 과외 알바를 하고, 좋아하는 책이나 실컷 읽고, 카페 탐방이나 하며 푹 쉬는 것을 허락받은 내게 고등학교 친구가 관공서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다른 지역으로 대학을 가고도 꽤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였다. 고향에 있는 관공서였기에 본가에서 다닐 수도 있었고,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이기 때문에 돈을 벌면서 공부도 할 수 있었다. 관공서인 만큼 근로조건도 좋았다. 좋았다기보다는 근로기준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었지만 칼퇴가 보장된다는 점에서 사기업보다는 좋겠거니 했다. 몇 개월 일하고 월급도 받아본 지금으로써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한국에 이보다 더 좋은 아르바이트는 거의 없을 거다.


서울 자취방과 과외 아르바이트를 정리하고 본가로 들어왔다. 갑작스레 과외를 그만두게 되었음에도 복학해서 서울 올라오면 꼭 다시 과외를 받고 싶다고 해주셨던 과외학생의 말씀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우리 딸은 참 인복이 있네.” 친구의 제안에 응하기로 하고 서울의 일을 정리하고 돌아온 내게 부모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분명 그다지 성실하지 못했던 행적에 비해 과분한 복이었다. 정신과 약을 먹던 그때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 경제가 마비되고 국내 모든 대학이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감히 ‘자본주의적 낭만’을 운운한다. 부모님께서 보내주시는 생활비와 과외 아르바이트비를 합쳐 50만 원 남짓한 돈으로 살림을 꾸리던 대학생은 매달 사회초년생 직장인 월급에 맞먹는 돈을 받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주는 혜택이 무엇인지를 낭만적으로 깨우쳤다. 소비의 폭이 배로 넓어졌다. 가족, 친구들에게 좀 더 좋은 선물을 할 수 있었고 나 자신에게도 더 많은 자본을 투자할 수 있었다. 케이크 한 조각을 사려고 들어간 가게에서 마카롱 하나를 더 사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었고, 예민한 피부에 맞는 화장품을 찾기 위한 기회비용을 그다지 아까워하지 않게 되었다. 넷플릭스를 프리미엄으로 끊고 철학책 구독 서비스를 결제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다. 오로지, 는 아니겠지만 대부분 다달이 내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이루어낸 결과일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몇 달 후의 복학을 상기시키며 소비습관을 잘 들여야 할 것임을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자본의 낭만에 젖은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비로 등록금을 마련하라’는 말을 들은 오늘에야 푹 담그고 있던 팔 한쪽 정도는 들어 올렸지만, 수십 년을 저축해도 내 집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대한민국,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가치소비와 FLEX가 공존하는 이 시대에 학생의 신분으로 물질이 주는 낭만을 조금이나마 맛본 나는 그것을 부수기가 싫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운이 좋았던 대학생은 이제 온몸을 적시고 굳어가는 낭만을 부수고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공언이자, SNS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내 삶을 기록하기 위한 첫 글이다. 아마도 내가 부술 낭만은 ‘자본주의’만이 아니겠지만, 아직은 또 어떤 것을 부수어야 할 낭만으로 규정하고 글을 써 내려갈지 잘 모르겠다. 이런 기록까지 읽어주시는 분이 있다면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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