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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ug 25. 2020

병아리의 시간

반려닭과 함께 산다는 것

병아리는 귀엽다. 보송보송한 노란 솜털, 삐약삐약하는 울음소리, 작지만 따뜻한 주황색 발까지. 거기에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앙증맞은 모습에 반해 멋모르고 학교 앞에서 사 본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스러운 외양에 반해 부모님의 한숨을 뒤로하고 데려왔던 병아리는 대부분 내 부주의로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집이 너무 추워서, 사람 손에 있는 병균 때문에, 월령에 맞는 모이를 주지 않아서, 또 언젠가는 집 앞 정원의 길고양이에게 물려서. 그렇게 우리 집에 왔다가 죽은 병아리가 몇 마리나 되었음에도, 어렸던 나는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병아리나 햄스터, 강아지를 아이들에게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던 시절이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키우는 동물에게 ‘반려’라는 단어를 붙여서 부르는 요즘이라면 기함할 일이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집에서 키우는 동물에 대한 인식은 그랬다.


그렇지만 늘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던 막내동생이 집에서 달걀을 부화시켜 보고 싶다고 했을 때, 내 거부감은 상당히 컸다. 유감스럽게도 당시에는 별 느낌이 없었던, 우리 집을 거쳐갔던 병아리들의 죽음이 떠올랐다. 꼭 병아리가 아니더라도 한 생명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우며, 그것을 책임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머리가 굵어진 이후로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족 중 다수가 반대했음에도 집에는 부화기가 도착했고, 세 개의 유정란 중 하나에서 병아리가 태어났다. 가장 먼저 껍데기에 숨구멍을 뚫었던 병아리는 결국 알을 깨지 못하고 죽었고, 숨구멍에 부리를 내놓고 숨만 쉬던 아이는 새벽녘 알을 깨고 나왔다. 갓 태어나 울고 있는 병아리는 너무, 너무 약했다.


병아리가 부화하는 것을 기다리고, 지켜보면서 나를 숨 막히게 했던 게 있었다. 부화기에 넣은 세 개의 알 중 몇 마리가 부화에 성공할까, 하는 질문에 담긴 함의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 생명의 탄생을 성공과 실패로 구분 짓는 것이, 몇 마리가 태어나느냐에 따라 걱정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이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알을 새의 세계로 만든 게 우리인데. 그래서 한 마리가 태어나고 두 마리가 죽은 그날 밤에 나는 조금 울었다. 산다는 걸 알게 하지 않았으면 죽는 것도 몰라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우울해하기에는 눈앞에 털도 채 다 마르지 않은 너무나 작은 병아리가 살아있었다. 그때부터는 ‘병아리의 시간’이었다.

갓난아기가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는 것처럼, 갓 태어난 병아리도 마찬가지였다. 탯줄마저 떨어지지 않은 병아리는 수건을 깔아 둔 상자 안, 전구 바로 아래에서 잠만 잤다. 간혹 일어서더라도 전구 아래를 벗어나지 않았고, 작은 발로 걸어 다니다가도 금세 선 채로 졸았다. 온 가족이 돌아가면서 병아리를 들여다봤다. 민들레 홀씨 같았다. 훅 불면 날아가 버릴 것처럼 작고 약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태로운데, 보고 있지 않으면 더 불안했다. 수시로 온도계를 들여다보고 병아리를 살폈다. 태어난 지 이틀 차, 병아리를 지켜보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으로 병아리가 우리를 구경하러 걸어 나올 때까지 말이다.

다행히도 인터넷의 ‘병아리 키우는 법’ 빅데이터를 토대로 돌본 병아리는 일주일 차에 거실을 구경하고, 2주가 지나서는 거실을 뛰어다녔으며, 한 달이 지나서는 털갈이를 하며 집안 탐험을 시작했다. 사람만 보고 자란 우리 집 병아리는 사람이 무섭지 않은지 가족 누구한테든 올라앉았다. 따뜻한 곳을 찾아 팔에, 다리에, 손에, 심지어 등에도 앉았다. 나중에는 맨바닥이나 쿠션 위에도 앉아서 자는 걸 보고 그냥 아무 데나 앉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아무튼 우리 집 병아리는 그랬다. 잘 울지도 않고,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순한 병아리였다. 힘겹게 알을 깨고 나와서도 두 발로 서 있었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그리고 솜털 같았던 작은 병아리는 작은 닭이 되었다. 병아리는 추위에 약하고 닭은 더위에 약하다는 사실에, 이제는 삶의 터전을 베란다로 옮겼지만 한여름 기온이 가장 높은 시간에는 태양을 피해 거실의 막내동생 옆에서 놀고 잠을 자는 여전히 조용한 꼬마닭이 되었다. 이제는 삐약삐약보다는 꼬꼬꼬 소리를 내는, 잘못 쥐면 사그라질 것 같은 노란 솜털은 벗어내고 북슬북슬하지만 놀랄 만큼 부드러운 갈색 깃털을 가진 과묵한 꼬마닭이.

병아리는 닭이 된다. 체온도 사람보다 더 높아지고, 냄새가 지독해진 똥을 이전보다 더 많이 싸고, 모이를 사고 매일 집을 쓸고 닦아주는 나는 의자와 청소기, 입닦개 정도로 취급하지만 태어나서 처음 본 존재인 막내동생은 잘 따르는 닭이 된다. 이 당연한 이치는 외면한 채 부화기를 구입하는 누군가에 화를 내고, 이 당연한 이치에 따라 더 크고 완전한 닭이 될 우리 집 병아리를 생각하며 눈가를 문지르는 나를 보면 내가 우리 집 닭을 생각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함에, 무수한 자기기만을 느꼈으면서도 결국은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음에 미안하기도 하다.


병아리의 시간은 짧다. 이건 샛노랗고 가장 귀여운 시절이 짧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반려동물이 그러하듯 닭이라는 동물의 수명도 인간에 비해서는 턱없이 짧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시간이 시작되게 한 건 우리 가족이자 나이기 때문에, 내가 발을 구르면 날개를 퍼덕이며 따라 하는 우리 닭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명의 무게가 더욱더 무거워질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결코 병아리의 생각을 알 수 없겠지만, 우리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만큼은 건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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