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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몽스 Nov 02. 2022

[리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을 보고

가족을 잇는 것.

"선택받은 건가 우리가?"

"보통은 부모를 선택할 순 없으니까."

"근데 스스로 선택하는 쪽이 더 강하지 않겠어?"

"뭐가 강해?"

"그러니까...유대...정 같은 거."


영화  『어느 가족』 中


가족을 잇는 건 무엇일까?

단지 낳음과 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직접 낳지 않아도, 같은 성씨를 쓰지 않아도 가족이 되기도 한다.


부모가 자식을 선택할 수 없듯이, 자식 역시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렇듯 가족은 서로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이어지는 관계다.

그러나 그 틀을 깬 가족이 있다.

바로 영화  『어느 가족』 의 쇼타네 가족이다.

삶에서 각자 비어진 부분을 서로가 채워준다.

쇼타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름의 유대와 정을 유지한다.

자신을 낳은 엄마에게 학대당하던 유리는

오히려 쇼타네 가족의 품에서 안정을 찾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리길 내심 바라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오사무와 노부요는

쇼타와 유리에게 부모란 칭호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족의 형태를 띠는 그들은 인간성과 행복을 공유한다.

할머니의 연금과 도둑질로 삶을 유지하는 그들의 불안정한 삶은

끝이 붕괴가 될 것이 뻔하지만 서로를 잇는다.

죽으면 묻고, 잡히면 도망갈 것을 서로 알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산다.

필요로 시작된 관계지만

과정엔 유대가 듬뿍 묻어난다.

바다를 본 적 없는 유리를 위해 어느 여름의 하루를 가족이 함께 바다에서 보낸다.

불안정.

그것은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나와도

그들의 웃음을 마냥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필시 망가질 게 뻔한 한 가정의 순간의 행복은

망가질 게 뻔하기에 아름답게 보인다.


가족의 해체가 시작되고

누군가에겐 불행이

누군가에겐 제대로 된 삶의 노선이 펼쳐진다.

필요로 시작됐단 걸 잊고 산 그들은

가족의 붕괴와 함께 그들이 서로였던 이유를 다시금 깨닫는다.

그렇게 그들은 사회가 바라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위치로 돌아간다.

누구도 그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쇼타는 아버지가 필요했고

유리는 오빠가 필요했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서로, 그리고 자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곁에 그 누구도 남기지 못한다.

각자의 진실을 고백했음에도

서로 미워하지 않은 까닭이다.

가족의 정의가 허물어진다.

혈연, 혼인, 입양도 아니지만

가족이 될 수 있다.

삶에서 각자 비어진 부분을 서로가 채워준다면,

낳지 않아도 어머니가 되고, 성씨가 달라도 남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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