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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고히 Feb 23. 2024

육교

 기분 탓인지 올해는 눈을 거의 못본 것 같은데 겨울이 끝나기전에 갑작스러운 폭설이 내렸다. 회사가 있는 방배동도 예외는 아니어서, 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한 줄로 나있는 길을 따라 내내 종종걸음이었다. 몇 백미터를 걷는동안 깨달았는데, 걸을 수 있는 길은 대부분은 근처 건물의 관리인분들께서 나와서 치워주신 덕분에 생긴것이었다. 


 깔끔하고 높은 건물앞은 깨끗이 치워져 있는 방면, 낮고 오래된 건물앞은 눈이 그대로 쌓여있는 길을 걸으며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가르며 걷는 듯 했다. 공공의 영역은 온전히 '공공서비스'에만 기대고 개별 주체들은 스스로를 희생해서 '내것'을 넘어서는 영역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쌓인 눈의 고저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물론, 당장 나부터도 내 출근길이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 집 앞 쌓인 눈을 치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개탄할 입장은 아니고, 다소간의 씁쓸함 정도만을 곱씹으며 걷다가 회사 근처 육교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네댓명의 사람들이 "방배1동"이라 쓰여진 주황색 조끼를 입고 육교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조끼와 얼핏 보이는 나이대를 고려했을 때 공공근로중이신걸로 보였다. 평소에는 그냥 존재하는지 정도만 알고 있던 육교가 시선을 끌었다.


 사실 그 육교 50미터 옆에는 횡단보도가 있다. 150미터정도만 더 가도 또있다. 그래서 그럴까, 아침에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일부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그 육교를 이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곳에 4명,5명의 인원이 달라붙어서 제설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순간 사고가 비약하여 인류의 미래를 엿본 느낌이 들었다. 가치 있는 일은 AI가 하게 되고, 인간은 시간이 때울 일만 하게 되는 미래. 그 와중에도 일단 시간만 채우면 되니까 육교부터 치우라는 말에 별 고민 없이 치우는 미래.




 분명히 밝히지만, 그들이 해낸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적든, 그것이 공공근로의 형태이든 어쨌든, 타인을 위해 추운 날씨를 이겨내고 눈을 치워주시는 일은 지난달에 우리회사 시간외 근로 현황이 어떻게 되는지를 나타내는 그래프에 줄간격을 한시간동안이나 조정하는 나의 일 보다 높은 가치를 지녔으면 지녔지 절대 못하지는 않다. 다만 미래에 우리 인류가, 나를 포함해서,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잃은 채 별 의미 없는 것에 적당량의 시간동안 에너지를 소비하도록 강제받고 저녁에는 그 모든 것에 대한 회의감을 잊게만드는 자극에 빠져 살다가 뿌듯한 기분으로 잠에들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의 단초가 되었을 뿐이다. 잠깐, 근데 이게 미래의 얘기가 맞나?


 사실 그런데 육교부터 치우는 것이 정말 비합리적인지에 대한 판단은 어렵다. 대로변의 사람들은 어차피 조심히 걸을거고 또 건물주들은 각자의 이익에 따라 알아서 조금씩 눈을 치울 것이다. 그러나 육교는 보다 조심성 없는 아이들만 가끔 이용하고, 그들은 언제나 뛰어다니고, 육교 특성상 위치에너지가 올라가고, 가만두면 그 누구도 치우지 않을것이므로 빙판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인도에서 다쳐서 발생하는 사회적비용이나 다친 사람이 제기할 수 있는 행정소송의 가능성은 육교에서의 그것보다 상대적으로 적을것임을 예상할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판단했을 때는 육교에 쌓인 눈 부터 치우는 것이 훨씬 옳은 판단이 되시겠다.


 애초에 그 육교가 왜 유지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계단을 올라 길을 건너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귀찮아 단 한번도 이용해본적이 없다. 아, 근데 적다보니그렇네. 나중에 내가 자녀가 생긴다면 등하굣길에 근처의 횡단보도보다는 차라리 육교를 이용하라고 교육을 할 것 같다.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하느니 싱싱한 에너지로 육교를 통해 다녀라 라고 이야기하고는 적어도 그 구간에서의 교통사고로부터는 조금 더 안심하게 되겠지. 육교라는 건 부모의 걱정과 사랑으로 유지되는 것이구나.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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