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시간이 많아졌고, 그때 유럽 여행이 유행이었는데 대학생 때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유럽을 못 가봤기 때문에 정도?
퇴사 후 하루 동안 부지런히 짐을 싸고 그날 밤 비행기로 나는 런던에 도착했다.
대학생 때 방학마다 혼자서 해외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다.
출국 전까지만 해도 빨리 나를 괴롭히는 이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만 가득했는데 출국심사를 받고 런던 시내에 내리는 순간, 나는 멘붕 상태에 빠져버렸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수많은 백인들, 내가 아는 악센트와 확연히 다른 영어, 아직 유심칩을 구입하지 못해 무용지물인 스마트폰...(런던 내 무료 와이파이가 되는 곳은 거의 없었다.)
다행히도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던 런던 시내 지도를 보고 내가 8일을 지내게 될 호스텔에 도착했다.
내가 8일 동안 머물렀던 호스텔 로비
이 호스텔은 나보다 먼저 유럽을 여행하고 온 동생의 추천으로 오게 된 곳인데 예전에 성이었던 곳을 개조해 호스텔로 운영한다고 했다. 퇴사 직전 급하게 숙소들을 예약해야 했기 때문에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남녀 혼성 16인실밖에 없었다. 장거리 비행을 했기 때문에 나는 호스텔에서 쉬기로 했다.
호텔 로비에 앉아서 쉬고 있으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각자 쉬다가 자연스럽게 스몰 톡을 하고 친해지는 것 같은 눈치인데 로비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나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내 존재가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나는 방으로 올라왔다.
말레이시아의 P 할아버지
방으로 올라오니 내 옆 침대에 말레이시아에서 온 P할아버지가 짐을 풀고 있었다.
그는 환갑이 훌쩍 넘은 할아버지였는데 은퇴 후 홀로 세계 일주 중이라고 했다.
그가 나에게 건넨 간단한 인사를 계기로 우리는 P 할아버지가 떠날 때까지 6일 동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는데 60살이 넘는 사람과 친구로 지내는 일은 나에게 신선한 경험이 되었다.
능숙한 영어, 노련한 화술, 건강한 신체를 겸비한 그는 여러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호스텔에서 잔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호스텔 투숙객의 평균 연령을 훌쩍 뛰어넘는 나이였음에도 그 주위로 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P할아버지를 만난 후에, 용기만 가진다면 나이는 꿈 앞에서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M 언니
런던에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겁을 먹고 호스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들의 영어 악센트가 우리가 배우는 미국식 악센트와 많이 달랐기에 알아듣는 게 많이 힘들었고, 그들 또한 한국식 억양이 섞인 나의 영어를 들으면 "네 발음이 특이해서 잘 이해 못하겠어. 뭐라고?"만 되풀이했다.
그동안 해외여행을 하면서 의사소통으로 문제를 겪었던 적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많이 위축되어 레스토랑에 가서 주문하기도 힘들었다.
랍스터를 시켜놓고 집게 발 먹는 방법을 설명해달라는 말을 하지못해 그대로 놓고 온 웃픈 일도 있었다.
더해서 결정적으로 내가 겁을 먹고 밖으로 안 나가게 된 계기가 있었다.
영국의 화폐는 종류가 12가지나 되고 동전도 굉장히 많기 때문에 계산이 복잡했다.
나는 신사의 나라 영국을 믿고 내 손바닥에 동전을 우르르 쏟아붓고는 캐셔에게 돈을 가져가도록 했다. 복잡한 일을 피하고 빠른 계산을 위해서였는데, 내가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사기를 칠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했었다.
런던에는 2파운드라는 우리나라 화폐가치로 3천 원쯤 하는 동전이 있다.
무언가를 계산하려고 캐셔에게 2파운드 동전을 주었는데 캐셔가 "그건 우리나라 동전이 아니야"라며 돌려주는 것이다.
그랬다, 이전에 방문했던 어떤 가게에서 계산이 미숙한 동양인인 나를 보며 일부러 제3 국의 동전으로 거슬러 준 것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꽤 흡사했기에 나는 당연히 2파운드로 찰떡같이 믿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20원 정도의 가치를 하는 동전이었다.
이렇게 말도 안 통하고, 사기까지 당하니 나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아직 2달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 나는 답답한 마음에 유럽 여행 정보를 교환하는 카페에 내 이야기를 올렸고 누군가의 쪽지를 받게 되었다.
'저 그 호스텔 근처에 사는데, 런던 구경시켜드릴까요?'
나는 그 쪽지를 보고 하루 동안 고민하다가 이렇게 지내느니 누군가라도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 나은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만난 M언니.
M언니는 국내 유명 기획사를 다니다가 30대 중반에 그만두고, 영국으로 유학을 왔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런던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줬고 버스 타는 방법을 몰랐던 나에게 버스 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또 내가 런던을 떠날 때까지 문자로 나에게 맛집이나 내가 좋아할 만한 장소들을 보내주며 바쁜 일상 속에서도 처음 만난 나를 신경 써주었다.
그때의 나에겐 너무나 멀어 보였던 30대 중반, 그 나이에 안정적인 삶을 던지고 오로지 꿈만 향해 달려가고 있는 M언니가 나는 정말 멋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