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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euN 쓴 Nov 07. 2024

5. 위기. 탈주의 시대

대본을 무한대로 읽었다. 내가 나오는 부분은 정말 셀 수 없이 읽었다.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분명 배역을 받고 대본에 형광펜을 들고 표시를 할 때만 해도 대사가 얼마 없었다. 분명 얼마 없었는데, 왜 많아졌는지 모르겠다. 아닌가? 원래 많았던 건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내가 맡은 역할의 비중이란 주인공에 비하면 형편없이 적은 양이 맞다. 하지만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입에 붙질 않는다. 대사를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잘 외워진다고 해서 대사를 소리 내어 연습했다. 캄캄한 교실에 불을 켜고 들어가 아무도 없는 조용한 교실 빈 의자에 앉아 대본을 소리 내어 읽다가 보면 어느새 아이들이 들어 올 시간이 된다.


일주일이나 그렇게 연습했는데도 아직 입에 붙지 않는다. 대본을 손에 들고 터덜터덜 연습실에 도착했는데, 오늘따라 연출이 일찍 와서 앉아 있었다. 친구인 연출에게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 일찍 왔네" (연출이 친구)

"응, 생각할 일이 좀 있어서...(사이) 어떡하지 한 명이 못한다고 연락이 왔네."

"어? 배역받고 연습 들어갔는데 못한다고 연락이 왔다고?"

"직장을 옮겨야 되는데, 옮기면 시간이 없다고 하네. 우리가 연습시간을 바꾼다고 했는데 그래도 못 한다고 하는 거 보면 연습할 마음이 없는 거 같아"

"뭐야 배역 때문에 그만둔다고 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주인공 아니라고 안 할 사람은 아니었는데...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건가?"

"아.. 어쩌지 진짜 어렵네. 한 명 없다고 지금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 민폐네 그 사람."

"어떡하지 일단 멀티플레이(일인 다역) 해야지."

"그렇네 멀티를 해야겠네"

"그래 그럼 부탁할게"

"응? 응?"


뭔가 일이 잘 못 되어 버렸다. 대사 외우기 바쁜 이 시기에 갑자기 역할을 한 개 더 맡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맡았던 역인데, 그 사람이 연극은 못하겠다고 하면서 나가는 바람에 역할 맡을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역할 맡을 사람이 없어지면 새로운 배우를 뽑는 게 맞겠지만 취미로 하는 연극에서 새로 배우를 뽑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배역을 맡은 사람 중에 중요도가 낮거나 인물의 성격상 다른 배역으로 다시 출연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면 멀티플레이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중간에 배우가 탈주해 버리는 상황처럼 황당한 상황이 생긴다면 말이다. 연출과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배우가 한 번에 들어왔다. 나는 어떤 반론도 제기할 새 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이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넘어가 버렸다.


오늘은 대본을 들고 연습을 하긴 하지만 무대 위에서 움직임을 어떻게 할지 정하는 날이라 모두 가벼운 차림으로 연습에 왔다. 지난 연습까지는 대본을 읽거나 대화 위주의 연습이라 옷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 움직임이 들어간 연습을 하다 보니 옷은 편하고 움직임이 용이한 것으로 입고 모이기로 공지가 있었다. 연습이 시작되었다.

다들 연습을 많이 하고 모인 듯 자연스럽고 물 흐르듯 장면이 이어졌다. 중간에 배역이 해야 할 행동이나 꼭 서 있어야 하는 위치가 있다면 연출은 코멘트를 줬고, 그 외의 장면에서는 특별히 배우의 연기에 입을 대진 않았다. 관객의 입장에서 표현이 어렵거나 이해가 안 되는 곳에서만 지도가 있었다. 배역이 한 명 없었지만 연출은 연습을 진행하면서 탈주해 버린 배우의 역할을 나에게 대신 읽어보라는 식으로 하다가 연습 끝날 무렵 상황에 대해 이야길 해주고 정식으로 배역을 담당시켰다.


이제 정식으로 멀티플레이어가 되어 버렸다. 일인다역을 한다는 게 연기력이 좋아야 하는데.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부담감만 더 생겨버렸다. 원래 배역의 대사도 외우기 힘들었는데, 새로운 배역의 대사도 받아 오히려 연습을 더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물론 인물분석부터 다시 해야 할 일중 하나다.


손에 들고 있는 대본은 지난주와 같은  대본이지만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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