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기(暗記)를 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이 시기에 연습은 진짜 연습을 의미한다. 작은 여유도 없이 꾸준하게 연습을 해야만 한다. 연극 수업은 나의 일상 중 가장 즐거운 일탈이었는데, 이 시간만큼은 다시 집중모드에 들어간다. 마치 일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은 부담감이 생긴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겪지 않게 최선을 다해 연습해야만 한다.
외워야만 하는 암기에서 점점 암기(暗期)에 젖어 들어가는 중이다. 어두움이 길어지는 시간.
대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어려움이 느껴지는 중이다. 배역을 두 개나 소화해야 하다 보니 배역 분석이 두 배가 되었다. 배역분석이 끝나도 배역이 두 배가 되어 대사량이 늘었다. 맡은 역할의 비중이 큰 게 아니라 대사량이 많아졌다고 엄살을 부리긴 했지만 주연 보다 대사량이 적긴 했다. 하지만 외워야 하는 입장에서 한마디라도 늘었다면 양이 많아진 거니까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배역에 대한 고민이 길었던 일주일이라 이번엔 연습시간이 빨리 돌아오는 기분이다.
연습은 4주간 같은 연습의 반복이었다. 우선 연습실에 가면 가볍게 몸을 풀고 상대역이 오면 붙잡고 대사를 연습했다. 다른 장면을 연습해야 할 때면 다른 배역을 데리고 가서 연습을 했다. 늘 이런 식으로 연습을 하다 보면 연출이 들어온다.
연출이 들어오면 연습은 움직임도 더해진다. 연출이 대사의 완성도는 신경 안 쓰는 것 같다. 초반 2주 동안의 연습 중에는 버벅거리는 대사는 넘어가면서, 움직임이랑 상대 배역과 대화의 맛을 주요 포인트로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연습을 하고 나면 아직은 큰 그림에 불과 하지만 우리가 설 무대를 예상하면서 움직여 보기도 하고 그에 맞는 대사를 연습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큰 그림이 익숙해진 2주가 지나고 공연을 2주 정도 남긴 수업시간부터는 연기의 디테일 부분을 손보는 시간이었다. 대본이 익고 나니 대본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고, 연습이 어느 정도 되어 장면이 머릿속에 있으니 연출이 의도하는 장면의 작은 부분까지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연기나 움직임이 추가된 부분은 대분에 메모를 해두었고, 혹시나 까먹을 수 있는 장면은 녹화를 해두어 일반 연습시간에 보면서 연습을 했다.
중간에 조금 부족한 연습은 따로 상대 배역과 약속을 잡고 만나서 연습을 했다. 개인 연습이 부족하면 혼자 연습하기도 했다. 연습실을 빌려 연습하면 편하기도 하고 움직임에 대해서도 자유롭기 때문에 주로 연습실에서 연습했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이거나 소수의 인원이 참여한 연습은 반드시 녹화된 내용을 보고 연습했고, 중요한 장면이거나 아직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의 장면은 연출에게 따로 부탁해서 연습에서 연기 지도를 받기도 했다.
수업시간 막바지가 되면 연습이 거의 공연처럼 되는데, 움직임이 들어간 연습은 조금 어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우리가 정해진 수업시간 3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연습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연습을 바로바로 하고 싶어도 앞부분의 장면 연습을 하고 있으면 연습실 한쪽에 앉아 대기할 수밖에 없다. 대기하는 중에도 대본을 외우긴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대사도 입에 익고, 장면도 눈에 익어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
나는 배역이 두 개다. 배역이 두 개라고 해서 연습을 두배로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이 대사가 더 많고, 장면에 대한 표현과 감정을 바꾸는 일도 많으니 더 힘들긴 하다. 하지만 나 역시 두 개의 배역을 맡게 되면서 외워야하는 대사량이 늘고, 의상도 중간에 바꾸어 입어야 한다.
나의 멀티 플레이 역할은 연극 전반부와 후반부에 한번 나오는 역할과 중반부에 길게 한번 나온다. 그럼 앞에서 배역 1의 의상과 분장으로 있다가 다시 배역 2의 의상으로 갈아입고 연기를 마친 후 무대 뒤로 들어오면 처음 입었던 배역 1의 의상과 분장으로 다시 바꾸는 일을 해야 한다. 처음 배역 1에서 배역 2로 바꾸은 건 시간이 조금 넉넉해서 무리가 없는데, 나중에 배역 2를 하고 들어와선 곧바로 배역 1로 바꿔 나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대사량도 늘고, 무대의상도 늘고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분주하고 바쁜 역할이 되었다. 연습이 거듭되면서 익숙해질 것이라 믿으며 다시 연습에 또 연습을 더해간다. 암기(暗期)의 기운을 몰아내고 명기(明氣)의 기운으로 채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