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쉽게 풀린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어딘가 문제가 생긴다'는 절대적인 진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시파티에서부터 다져온 우리의 친목을 도망쳐야 할 덫쯤으로 생각하는 걸까? 어떤 마음을 먹어야만 배역 발표가 나서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 시기에 그만둔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배역에 대해 부담이었다는 걸까? 배역이 정해지자마자 그만두고 나가버린 거 보면 이렇게 밖에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대본이라는 건 정해진 인물과 정해진 대사로 펼쳐진 예술이다. 예술을 표현하기 위해 준비된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데, 다 모여 있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도중에 예의 없는 사람이 발생하니 예술이 완성되기 어려워진다. 멀티 플레이어는 이렇게 펑크 난 캐스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멀티 플레이어는 두 가지 이상의 배역을 받아 든 사람이다. 오해할 수 있는데, 멀티 플레이어는 벌칙이 아니다. 마치 벌칙에 당첨된 사람처럼 써 놓았지만 멀티플레이어는 오히려 고 능력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부러 멀티플레이어를 역할하는 사람도 있다. 연기를 잘하고 캐릭터가 확실하다면 두 가지 이상의 배역을 맡는 것은 허다한 일이다. 물론 '허다한'에서 나의 경우는 제외다. 여긴 연기를 배우고 연습하는 곳인데, 배우긴커녕 역할을 두 개나 맡아야 한다는 것이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란 말이다.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 배우 '이지은 님'이 언니라고 부르는 귀신이 있는데, 마고신 '서이숙 배우'님이다. 마고 신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는데, 재물에 관련되면 귀족을 역할하고, 벌을 주는 신이면 무서운 마고신으로 역할한다. 아픈 사람이 있는 곳엔 우리 할머니 같은 모습으로 역할한다. 하나의 역할을 소화하는 것 같지만 의상이며 행동, 말투까지 같은 점이 전혀 없다. 이런 역할이 멀티 플레이어가 해야 하는 일이다.
간혹 일반인 연극 수업에는 개인의 사정에 의해 도중 탈락자가 발생한다. 빠지는 이들을 전적으로 탓할 수는 없지만 한번 맡은 일에 대한 책임이 없음에 대한 부분은 조금 아쉽긴 하다. 한번 같이 하기로 했다면 끝까지 제 역할을 감당해야 하고, 그 부분이 어렵고 부담스럽다면 본인이 역할을 맡지 않고 체험을 위해서만 등록을 했어도 되는 일이었다. 이번 일처럼 배역 발표가 있고, 심지어 연습 중간까지 지나서 포기한다면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사람에게 부담이 되는 행동이 되는 것이다.
공연의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서든 연기 잘하는 배우의 찰떡 배역을 위해서든 멀티플레이어는 연극에서 상당한 중요도를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배역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은 관객에게 어쩌면 무대에서 주인공만큼이나 돋보이거나 인상적일 수 있다. 우리의 상황이 그래서 그렇지 멀티 플레이어는 욕심을 가지고 도전해 볼만한 역할임에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