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항암 치료 후 남편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시댁에 며칠 머물다 왔는데 목소리도 밝았고 밥도 잘 먹고 있다고 했다. 예상 외로 수월하게 넘어가는구나 싶었는데, 아직 시작도 안 한 거였다. 아이들과 나는 친정에 있고 남편은 집에 머물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하러 친정에 왔다. 식사를 하러 오던 남편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린다며 차를 운전하다 집으로 돌아갔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는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운전이 필요해
남편 눈에 눈다래끼가 생겼는데 너무 커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몇 대 맞은 것처럼 눈이 퉁퉁 부었다. PICC 소독을 하러 병원에 가야 하는데 눈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니 운전하는 게 불안불안했다. 내가 운전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운전을 못하니 속상했다. 얼른 운전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운전면허학원에 전화했더니 도로 연수 대기가 많아서 몇 주 기다려야 하고, 3일 연속으로 받아야 하고 사정이 생겨도 예약 변경이나 환불이 안 된다고 했다. 이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나,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할까 하다가 막상 아쉬운 건 나였다.
첫째 등하원을 해야 하는데 남편이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아빠에게 연락해서 아빠가 대신 아이의 등하원을 도와줬다. 이 소식을 들은 언니는 형부에게 부탁했는지 형부가 갑자기 나에게 운전 연수를 해주겠다고 했다. 2시간 정도를 배웠는데 형부가 너무 잘 가르쳐 주셨다. 조금 잘하면 '오 잘 하는데?' 칭찬해주고, 차선 바꾸기가 무섭다는 나에게 '그럼 운전을 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말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로 주행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주차가 어려웠다. 오른쪽 핸들을 돌리면 바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잘 안 됐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 장난감 자동차로 핸들을 돌려 보며 방향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익혔다.
주말마다 친정에 가면 아이들을 맡기고 아빠에게 운전 연수를 했다. 나름 잘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빠가 집에 오더니 언니에게 '얘는 운전이 원체 서툴다'고 말하는 걸 보고 오기가 생겼다. 남편이 컨디션이 괜찮으면 내가 운전을 해보면서 운전 감을 익히고, 아빠를 태우고 커피를 사러 가던 날 아빠가 이제는 제법 잘 한다고 칭찬을 해줬다. 뭐든 절실하면 더 빨리 배우나 보다. 그래도 운전하면서 사고 나는 건 한순간이라는 걸 알기에 지금도 조심 또 조심하며 운전을 한다.
한 달 정도 운전을 배우고 바로 아이들 등하원을 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엄마가 운전을 한다고 좋아하며 응원을 해줬다. 날이 좋은 날이면 하원 후 아이들과 오죽헌과 바다에서 놀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남편이 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눈다래끼는 향균비누를 사용하면서 다행히 많이 좋아졌다.
함께 걷기
남편의 두 번째 항암 부작용은 변비였다. 먹는 건 있는데 나오는 게 없으니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다고 했다. 많이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남편과 함께 뒷산을 오르고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연애 때 이후로 같이 손을 잡고 걸어본 적이 없는데, 힘겨워하는 남편의 손을 맞잡고 함께 걸었다.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우리는 희망을 향해 함께 걷는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TV에 유튜브를 연결해서 '땅끄부부 홈트'를 보면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긴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운동을 하는데 자꾸만 웃음이 났다. 암에 걸리지 않았으면 남편이 땅끄부부 홈트를 보면서 집에서 운동하는 걸 볼 수 있었을까. 뜻하지 않은 상황은 때론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든다.
그나마 걸을 수 있는 날은 행복한 날이었다. 기력이 없어서 매일 누워 있던 남편은 나가서 걷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일을 하던 남편이었는데 아침, 점심, 저녁으로 누워있기만 한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한번은 친정에서 종일 아이들을 돌보느라 힘들었는데, 저녁을 먹으러 온 남편이 이것저것 시키는 거에 화가 난 적이 있었다. 집에 와서 그때 속상했다고 말했더니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날 힘이 없어서 그랬다고, 오죽했으면 그랬겠냐고 미안하다고 했다. 차라리 남편이 못되서 그런 거면 더 나을 뻔했다고 생각했다.
유튜브 먹방
항암 치료 중에는 입맛이 없어도 잘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인스턴트 음식이든 먹을 수만 있으면 뭐든 먹는 게 좋다고 했다. 다행히 남편은 아예 못 먹지는 않았다. 다만 입맛이 바뀌어서 입이 달아서 주스를 먹어도 맛이 안 느껴진다고 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김치도 맛이 잘 안 느껴진다고 했다. 남편이 건강식을 먹었으면 했지만 남편은 입맛이 없으니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으려고 했다. 자극적인 음식이 몸에 좋을 리 없으니 결국 탈이 났다. 내가 요리를 잘해서 맛좋은 음식을 차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계란찜 하나도 맛있게 끓여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마저도 남편이 간이 안 맞네 어쩌네 이야기를 하면 하기가 싫어졌다. 소심한 나란 인간...
남편은 유튜브 먹방을 보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먹방을 보는 게 잘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는 이해가 된다며 맛있게 먹는 영상을 보면서 대리만족하며 밥을 먹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왜 이리 짠한지.
항암 부작용은 몇 차례 겪으면서 익숙해질 것 같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에게 불편한 게 익숙해지는 게 더 이상할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은 2주에 한 번씩 항암치료를 하러 갔는데 항암 치료를 하고 오면 일주일은 거의 누워서 지냈다. 일주일이 지나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3-4일을 보내면 또 다음 치료를 받으러 갔다. 오전 일찍부터 검사와 진료, 항암 치료가 있었기 때문에 전날 미리 가서 동생 집에서 자고 진료를 갔다. 시동생은 터미널로 남편을 태우러 가고, 다음 날 병원까지 태워다주었다.
남편이 서울에 가는 날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 근처에 있는 수제버거집에 들렀다. 첫째가 좋아하는 감자튀김을 살 수 있고 나는 저녁을 간단히 때울 수 있는 햄버거를 살 수 있었기에 좋은 선택지였다. 수제버거를 기다리며 둘째는 울고 첫째는 떼를 쓰고. 아이들이 잠들기까지 그날 밤은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지금도 그 수제버거집을 지날 때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린 두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버텨야만 했던 그 시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