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를 발굴하던 어떤 고고학자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인류가 이천 년 동안 별로 이룬 일이 없구나…” 화산재에 덮여 보존된 고대 로마인들의 일상은, 현대인의 일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으며, 도시를 구성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수레의 야간 운행을 돕기 위해 도로에 반사석을 설치한 당대의 기술자는 원로원 과학기술위원회로부터 ‘스마트 도로 시스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연구개발비를 지원받았을지도 모른다.
도시라고 하는 것은 항상 어떤 의미로든 스마트했었다. 자칭 전문가들은 스마트 도시를 ICT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혜성처럼 나타난 상품처럼 마케팅한다. 와이파이, 초고속통신망, CCTV, 태양광 발전 등은 대개 스마트 도시 자체와 동일하게 포장된다. 그러나 스마트함 자체는 기술의 층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식으로 생활공간에 오랜 세월 존재해왔다. 기술이 제공하는 비즈니스 기회와 스마트한 생활은 별개의 문제이다. 엉성한 건축적 하드웨어 표면에 덧대어진 급조된 IT 기술은 처음에는 신기하고 유용해 보이며, 심지어 건축의 결함을 해결해 줄 마법의 망토처럼 보이지만, 이내 키치로 전락하고 애물단지가 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에 특별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너무 많은 급조된 스마트 서비스의 실험대상이 되고 있다. 제대로 된 프로토타이핑 없이 부처의 예산 처리 관행과 실무자의 비전문성에 기생하는 약장사들이 만들어낸 단발성 스마트 서비스가 범람한다. 건물의 외피가 움직인다고 해서, 미디어 파사드가 화려한 야간 경관을 연출한다고 해서 건물이 스마트 해지는 것은 아니다. 전력생산을 위해서 태양광 패널을 이리저리 붙여서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한 건물이 스마트할 수도 없다. 소프트웨어랍시고 무슨 공연이며 디지털 콘텐츠를 집어넣지만 사실 그들은 문화와 이벤트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라파엘 로자노 에머의 Body Movies와 같은 시도는 기술이 어떻게 숨어있어야 하고, 작업이 장소의 역사와 어떠한 연속성을 가지며,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참여함으로써 완성될 수 있는 스마트함의 본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라츠의 쿤스트하우스는 개방적 미디어 플랫폼으로서의 건축물이 슬럼화 된 구도심을 어떻게 활성화시키고 세계와 연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새로운 기술을 덧대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에 주목하고 기술을 숨기는 것이야말로 스마트한 도시를 만드는 필수 작업이다. 과거 기능주의 건축이 실패한 것은 그것이 기능적이어서가 아니라 기능을 상징하기만 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실제 기능하는 것보다 더 기능적인 것처럼 보였다(1). 마찬가지로 유사 스마트 도시는 실제보다 더 스마트해 보이기 마련이다. 스마트 도시라는 트렌드 속에서 건축의 하드웨어와 생산 유통 시스템은 아직 과거 진행형이다. 더 튼튼하고 편안한 문고리나 정교한 창호는 여전히 우리가 아쉬워하는 스마트한 건축의 요소이다. 건축가들의 역할은 급변하는 기술을 추종하거나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건축적 하드웨어는 여전히 문제투성이이고 지금보다 훨씬 스마트해져야 한다. 새로운 기술에 감탄하기는 쉬워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삶의 본질이다. 건축은 그러한 삶을 그리는 캔버스(2)가 아닌가?
1. Charles Jencks
2. Bjarke Ing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