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ng Smart
"나온지 1년이 되지 않은 기술은 1년 안에 사장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반면 수천년간 지속된 기술은 앞으로도 수천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 나심 탈레브
우고 갈리알디(Ugo Gagliardi) 교수는 객체지향 데이터베이스의 대가로서 이 분야의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했다. 교수님의 수업을 수강하게 된 인연으로 학위논문 심사위원 중 한 분으로 모셨고 한참 논문을 쓰던 1996년 무렵에는 보통 2~3주에 한 번꼴로 연구실을 방문해서 지도받았다. 당시 교수님 댁의 모뎀이 감당하기에는 내 원고가 너무 길었다. 대체로 건축 분야 논문이 컴퓨터사이언스에 비해서 너무 장황한 것이 불만이셨지만, 항상 사전에 페덱스(Fedex)로 보낸 원고를 꼼꼼히 읽고 날카로운 지적을 해주신 빨간펜 선생님이셨다. 교수님의 연구실은 하워드 에이켄(Howard Aiken)을 기념한 에이켄 연구소(Aiken Lab)에 있어서 방문할 때마다 로비에 있는 그의 기념비적인 컴퓨터인 마크 원(Mark I)의 잔해를 지나치곤 했다. 교수님은 가끔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당신이 저 마크 원 이후 컴퓨팅의 역사를 줄곧 본 산 증인이라고 했다. 실제 수업 중에 이런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1976년 자일로그(Zilog) Z80이 등장했을 때 산업계와 학계는 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미래에 대해서 회의적이었고 메인프레임이 대세라는 주장이 강했다고 한다. 하루는 수업 때마다 늘 졸던 학생 하나가 웬일로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고 한다. “교수님,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가 찼던 교수님은 “그건 그냥 토이 인더스트리(Toy Industry)야. 미래가 없네!”라고 대답했고 그 학생은 그렇냐면서 다시 졸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학생은 대학을 중퇴하고 회사를 차렸는데, 그 회사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였다고 한다.
인공지능 연구의 선구자인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 교수의 수업을 듣기 위해서 MIT 미디어랩(Media Lab)을 들락거렸던 것이 1993년이었다. 이 수업에선 늘 피자가 제공되었다. 라운지 여기저기에 놓인 정체불명의 검은색 캐비닛 상자를 테이블 삼아 피자를 먹다가 그 상자의 정체를 깨닫고 나와 동료들은 탄성을 질렀다. "이거 커넥션머신이잖아!" 커넥션머신(Connection Machine)... 지금도 SF영화 속 슈퍼컴퓨터의 아이콘처럼 쓰이는 이 획기적인 컴퓨터가 피자 테이블로 전락하는 데는 5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림 1> 커넥션 머신(Connection Machine)
컴퓨팅 분야의 발전 속도는 엄청나지만, 한편으로 늘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기술이 다른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것인 양 나타난다. 온갖 팬시한 이름을 새로 갖다 붙이지만 그게 그거다. 전기밥솥에 들어가는 퍼지로직 하던 이들도 지금 인공지능 대가라며 약을 팔고 있다. AI의 미래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겐 그런 혜안이 없다. 기술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술의 우수성보다는 마케팅이나 우연한 사업 기회에 의해 좌우되는 일은 허다하다. CAAD의 선구자인 빌 미첼 교수도 그의 저서 'Computer Aided Architectural Design'에서 래스터 방식의 디스플레이는 너무 비싸서 벡터 디스플레이가 답이라고 단언했었다. 새로운 기술의 잠재적 가능성은 전문가들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지금 AI로 포장된 많은 기술들의 근미래는 점칠 수 있다. 별로 이룬 것 없이 조만간 포장지를 바꿀 것이다. 완벽한 킬러앱 기술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동화와 무인화, 그리고 맞춤형 서비스는 스마트 도시 기술의 성배처럼 제시되지만, 일상에서 수시로 우리는 기술이 가진 양날의 검을 깨닫게 된다.
폼페이를 발굴하던 어떤 고고학자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인류가 이천 년 동안 별로 이룬 일이 없구나…” 화산재에 덮여 보존된 고대 로마인들의 일상은, 현대인의 일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으며, 도시를 구성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수레의 야간 운행을 돕기 위해 도로에 반사석을 설치한 당대의 기술자는 원로원 과학 기술위원회로부터 ‘스마트 도로 시스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연구개발비를 지원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림 2> 폼페이의 도로. 고대 로마인들은 수레의 야간 운행을 돕기 위해 도로에 반사석을 설치하였다.
도시라고 하는 것은 항상 어떤 의미로든 스마트했었다. 자칭 전문가들은 스마트 도시를 ICT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혜성처럼 나타난 상품처럼 마케팅한다. 와이파이, 초고속통신망, CCTV, 태양광 발전 등은 대개 스마트 도시 자체와 동일하게 포장된다. 그러나 스마트함 자체는 기술의 층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식으로 생활공간에 오랜 세월 존재해왔다. 기술이 제공하는 비즈니스 기회와 스마트한 생활은 별개의 문제이다. 엉성한 건축적 하드웨어 표면에 덧대어진 급조된 IT 기술은 처음에는 신기하고 유용해 보이며, 심지어 건축의 결함을 해결해 줄 마법의 망토처럼 보이지만, 이내 키치로 전락하고 애물단지가 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에 특별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너무 많은 급조된 스마트 서비스의 실험 대상이 되고 있다.
요사이 공공건축물의 설계 심사 가이드에는 4차산업혁명(대개 4차산업이라고 오기) 기술 적용. IoT, 인공지능 등 스마트 기술 사용과 같은 문구가 과거의 바람길, 통경축과 유사한 키워드가 되고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실제 스마트한 건축공간 구현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뻔한 예산에 제대로 구현이 불가능해서 일시적인 눈요기감으로 방치될 숙명을 가지고 있다. 건물의 물리적 성능을 얼마나 합리적으로 측정하느냐도 여전히 미완의 과제이지만 거주자의 신체적 정신적 감성적 삶의 질을 높이는 스마트함을 갖추었는지, 혹은 미래 기술에 대한 수용성을 가졌는지, 새로운 기술에 대응한 공간계획의 유연성이 있는지가 스마트한 건축의 지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저 특정 신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스마트 건축을 정의하는 것은 그 유효기간이 짧으며 자기모순에 빠지기 쉽다. 기계식 엘리베이터가 처음 도입되었을 당시의 충격은 스마트 건축을 넘어서 마법처럼 강렬했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엘리베이터를 스마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제시하는 스마트함에 어떤 증거(evidence)가 있는지, 디지털 전환의 패러다임에서 측정할 수 있는 어떤 성능(performance)이 있는지, 미래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지 (future-proof), 이러한 디자인이 건축산업 생태계 전반에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이러한 스마트 요소들은 중장기적이고 다학제적인 연구, 그리고 충분한 프로토타이핑이 필요한 부분이지, 일선 발주처에서 마구잡이로 끼워 넣는 몇 개의 유행어로 치부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창문이 아니라 창밖을 보자. 기술은 창문처럼 창밖을 보기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는 없는 듯 숨어있을 때 최선의 기술이 된다. 스마트함이란 급조된 지침으로 이뤄질 수 없는 지혜의 경지이다.
<그림 3> 영화 London has Fallen 중. TV 화면을 통해 타격 시점을 원격으로 확인하며 단 한 방으로 결정타를 먹이는 ‘스마트함’은 사용자에겐 신적 능력을 안겨주지만 당하는 이에겐 영화속 테러리스트의 모습처럼 극악의 공포로 느껴진다. 스마트 폭탄의 탄생이 시사하듯 스마트라는 용어는 정확성, 경제성, 무인화, 자동화의 의미를 담고있다.
스마트 도시는 이미 신선함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용어이다. 멀쩡하게 건축 행위를 하고 도시 관련 일로 벌어 먹고살던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사는 도시는 스마트하지 않아서 엄청나게 문제가 많으니 스마트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갑자기 도시가 멍청해진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서 스마트, 스마트를 외치는데, 정작 벌여놓은 일은 그다지 스마트해 보이지는 않는다. 스마트 도시란 뭘까? 도시가 스마트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스마트 건축 스마트 도시를 논하기 위해서 스마트하다는 것의 의미를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스마트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무기 개발 분야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수년간 수백 대의 항공기를 잃어가며 엄청난 폭탄을 퍼붓고도 실패를 거듭했지만 1972년 TV 유도 폭탄 월아이2(Walleye 2)를 투하하여 타인호아 철교를 파괴한다. 유도 폭탄은 이미 2차대전 당시 독일이 개발한 Fritz-X나 V1 무인 폭탄이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TV 화면을 통해 타격 지점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단 한 방의 결정타를 먹이는 ‘스마트함’은 사용자에겐 신적 능력을 안겨주지만 당하는 이에겐 영화 속 테러리스트의 모습처럼 극악의 공포로 느껴진다. 스마트 폭탄의 탄생이 시사하듯 스마트라는 용어는 정확성, 경제성, 무인화, 자동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손의 섬뜩한 통제 능력도 함께 갖추고 있다.
<그림 4> 월아이 2. 스마트 폭탄의 탄생이 시사하듯 스마트라는 용어는 정확성, 경제성, 무인화, 자동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손의 섬뜩한 통제 능력도 함께 갖추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스마트함의 필수 조건이지만 스마트하다는 것은 애초에 양날의 검을 가지고 있다. 건축공학 특히 구조공학의 목표가 튼튼한 구조를 설계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부분 구조물은 피라미드처럼 육중하게 지으면 된다. 실은 최소한의 자원을 사용하여 한정된 범위 내에서 안전이 보장된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그 목표다.
50년 설계, 100년 설계의 의의는 과거 50년간, 혹은 100년간의 데이터를 근거로 해서 재해로부터 안전을 보장하는 설계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00년간의 강우량 기록을 근거로 범람하지 않는 하천 복원을 설계했다, 뭐 그런 거다. 이러한 안전함의 역설적 의미는 50년, 혹은 100년 이상의 기간 발생한 더 강력한 재해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물막이벽의 수위 범위를 넘어 범람하는 해일에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 차원에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일본이 왜 그랬을까? 설계한 범위를 벗어나는 재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해는 언젠가는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것은 세월호 같은 인재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의 한계일 뿐이다.
발생할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매우 희박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발생하게 되어있고, 일단 한번 발생했다면 그 피해가 돌이킬 수 없이 큰 사건을 <블랙스완>이라고 한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검은 백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 되어버렸다. 최근 검은 백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러한 것이 블랙스완이다. 할머니들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본 적이 없는 4월의 대설과 같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 사태에서부터, 리먼 사태와 같은 금융 대위기, 최근의 코로나 사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러한 재앙이 닥치기 전까지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 속에 산다.
문제는 블랙스완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있으며, 그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는 것이다. 나심 탈레브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해법으로서 그러한 충격에도 살아남거나 더욱 강해지는 방법, 즉 Anti-fragile한 태도를 이야기한다. 전체 시스템을 위해서 병든 조직을 과감히 제거하기.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려면 스스로도 리스크를 껴안기. 조상들의 지혜를 바라보기. 등등…. 불행히도 현재 우리 사회가 결여한 요소들의 종합선물 셋 같은 내용이다.
스마트하다는 것의 의미는 종종 효율적이라는 의미로 오해된다. 그러나 기술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유통과 교통 혁명을 가져다줄 드론은 어느 날 수만 명이 이용하는 공항을 마비시키거나 무인 조종 폭탄이 되어서 끔찍한 테러의 수단이 된다. 인공심장은 어느덧 사물 네트워크 기술의 집적체가 되어 초연결 세상의 노드가 되지만, 동시에 해킹의 가능성도 커져서 수만 명의 사람을 한순간에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첨단 자동조종 항법장치에 숨어있던 소프트웨어의 버그는 최신 여객기를 한순간에 지옥행으로 만들어 버린다. 일개 전화국의 지하 공동구의 화재 만으로도 5G 통신과 IT 강국을 주장하던 나라의 통신망이 마비되고 사람들이 일순간에 석기시대로 돌아가는 살얼음판에서 우리는 스마트 도시를 이야기한다. 인재와 시스템의 부재가 작동하긴 하지만 이러한 재앙은 언젠가는 일어나게 되어있다. 과도한 자동화와 무인화는 블랙스완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문제는 스마트 기술이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살얼음판 같은 환상 위에서 적용되고 향유된다는 것이다.
'스마트'는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특정 기술에 묶어서 스마트 건축을 정의하면 이내 유통기한이 지나게 된다. 스마트 건축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다. '아서 클라크'의 경구를 빌리자면 '고도로 성숙된 기술은 마술과 구별하기 어렵듯이,' 전설 속의 마법같은 궁전이나 극장은 당대 첨단 과학기술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다. '오티스'가 엘리베이터를 발명했을 때 사람들은 마법이라며 경악했다. 사람들은 콘크리트(Beton arme) 캔틸레버 슬라브 밑에 서있으려 하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가 영국 지하철에 처음 선보였을 때 아무도 선뜻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일부러 목발을 짚는 장애인을 고용해서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락내리락 하게 했더니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저것봐. 뭐 새로운 거 나왔다고 함부로 쓰면 저렇게 되는거야!"하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이러한 신기술이 지속적으로 건축을 스마트하게 변화시킨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 아무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을 스마트 건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와이파이가 제공된 건물을 특별히 여기지도 않는다. 그런게 기술이다. '기술의 숙명은 쓸모없는 아름다움'이다(케빈 켈리).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신기술은 언젠가는 과거의 향수를 달래기위한 부적처럼 쓰인다. 촛불이나 타자기처럼.
스마트한 공간, 스마트한 건축, 스마트 도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제대로 아는 바가 없으므로 스마트 ㅇㅇ을 구현하는 것 자체는 불가능해보인다. 주위의 건물이라는 것을 뜯어보면, 정확히는, 뜯어 놓은 것을 보면 4차산업혁명이니 스마트니 하는 이야기는 너무 사치스런 사상누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건물들이 철근 하나 콘크리트 양생 하나 도저히 눈뜨고 봐주기 어려운 수준으로 만들어져 있고 어느 건축가의 지적처럼 의장이 아니라 화장을 한 건물이다. 부품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현장에서는 목공과 미장이 마무리하는 가상현실이 척박한 구조체의 현실을 포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가상현실이 MDF 패널이나 벽지에서 메타버스의 디지털 스킨으로 변화하고 있다. 건축의 하드웨어는 지금보다 훨씬 스마트해지거나 정상화될 여지가 많다. 그래서 스마트 건축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기술이 아니라 성능을 중심으로, 경제성을 근거로, 그리고 산업생태계의 기여도에 의거해서 건축의 스마트함을 평가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럼 성능은 어떻게? 단열과 에너지 저탄소와 같은 물리적인 성능은 스마트한 것처럼 포장되지만 결국 건축 본연의 기능이다. 미, 기능, 공리라는 건축 본연의 책임. 그 알리바이를 '스마트'로 메꾸려는 것은 아닐까? '삶의 질'이라는 추상적 특성을 측정 가능(measurable)하게 기술적 요소로 건물에 통합시킬 필요성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삶의 질이 마술과 구분되지 않는 스마트 기술에 의해 제공되길 바라는 것이다.
디지털 도어락과 같은 기술은 엄밀히 말하자면 건축가의 영역이 아니라 스마트 기술의 영역이다. 우리에게 일상이지만 디지털도어락으로 문을 여는 것은 특히 여전히 열쇠를 사용하던 외국인들의 눈에는 훨씬 스마트해보인다. 여러개의 문을 연속으로 통과하면서 스마트키를 사용한다면 그 편리함은 증폭된다. 근접센서나 안면인식 카메라가 작동하여 접근 권한이 있는 사용자에게 자동으로 문을 열어준다면 더욱 유용할 것이며, 이러한 상황은 <열려라 참깨!>나 킹즈크로스 역 9와 4분의 3 승강장과 같은 마법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태초에 인간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벽을 통과하거나, 높은 장소로 뛰어오르거나, 머나먼 곳을 볼 수 있는 그러한 능력말이다. 혹은 생명체와 상호교감하면서 자연을 거주 공간으로 변용하는 그런 능력도 있었을 것 같다. 현생 인류는 이제 한땀 한땀 과거의 능력을 복원하기위해 스마트라고 불리는 이런저런 기술을 개발하고 조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마트라고 불리는 이러한 편리함 자체를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다. 다만 건축가에게 스마트함은 기술의 조각들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읽혀야한다. 새로운 기술들은 계획에 있어서 공간의 위계나 분절과 같은 황금률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도서관은 어두운 곳에 책을 보관하고 밝은 곳에서 책을 읽는 공간이라는 경국도 무의미해진다. 물리적 공간을 매개로 하는 업무나 일상이 점점 축소되고, 소프트웨어가 건축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커지면서 공간의 압축과 무한확장이 가능하게 된다. 공간은 소비를 위한 콘텐츠가 된다 물리적 용기 (placeholder)로서 공간의 양태와 기능은 소프트웨어적으로 제정의될 수 있다. 스마트 재료와 디지털 장치들의 조합에 의해 재실자의 니즈와 신체 감성 상태에 따라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나 상태가 재편(reconfigure)되는 것은 과거에는 마술과 같은 기술이다. 이러한 그림에서 기존 건축가의 역할은 별로 없어보인다. 사람이 공간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공간은 사람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스스로를 재편한다. 그러나 조명 온도 음향 심지어 기하학적 구성을 복원한다고 해서 그 공간이 사용자의 기억이나 느낌을 완벽하게 복원한다는 보장은 없다. 기하학적 구성, 색채의 조화, 재료의 질감과 대비, 소리, 소음, 조명, 냄새, 온도, 습도, 바람, 사람 ... 공간에서 경험하는 그 모든 복합적인 상호작용과 상승작용의 결과는 그저 '좋았다'라는 느낌의 '기호'로만 남는다. 그리고 그 의미는, 눈동자에 찰랑거렸던 광휘로, 달콤함이라는 흔적으로, 채울 수 없는 아쉬움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한 간극을 메꿔주는 것은 건축가의 감성이 빚어내는 감각의 영역이다. 가전이나 컴퓨팅이 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며, 건축가는 그것을 대체할 느낌의 향연을 제공할 수 있다. 건축가는 가용한 스마트 기술을 통합하는 시스템 통합자의 역할을 넘어서 마술과 같은 공간을 코디네이트하고 느낌을 재구성하고, 기능능과 감각으로 인간에게 잃어버린 태초의 기억을 속삭여주는 마법사 (Memory Whisperer)가 되는 것이다.
"인간에겐 일백 가지의 감각이 존재하는 듯. 그러기에 사람이 죽더라도 우리가 익히 아는 오감만 함께 사라질 뿐 나머지 아흔 다섯은 살아 남아 주위를 맴돌것 같다는..."
- 안톤 체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