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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아 Feb 10. 2023

1. 스마트 시티 - 스마트 도시의 현재

Smart City- Status Quo

빈의 헤렌가세 14번지에 있는 카페 '첸트랄'로 ... 그러니 1913년 모더니즘의 중심지인 빈으로 가보자. 그곳의 주연배우들 이름을 일부만 나열해보자면 이렇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아루투르 슈니츨러, 에곤 쉴레, 구스타프 클림트, 아돌프 로스, 카를 크라우스, 오토 바그너, 후고 폰 호프만슈탈, 루트비히 비트겐쉬타인, 게오르크 트라클, 아르놀트 쇤베르크, 오스카 코코슈카. 이곳에서는 무의식, 꿈, 새로운 음악, 새로운 시각, 새로운 건축, 새로운 논리, 새로운 도덕을 둘러싼 투쟁들이 광란했다."
- 플로리안 일리스, 1913년 세기의 여름, p. 51



우리나라에서 스마트 도시 혹은 스마트시티는 애초에 U-시티(U-City)로 불렸다. Ubiquitous City. 미국인들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흔한 이 종교적인 용어 'Ubiquitous'는 뭔가 편재해있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신의 존재, 신의 사랑이 우리 주위에 충만하고, 손을 뻗치면 그 보이지 않는 사랑, 즉 어떤 기능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U-시티라는 용어를 거의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했고, IT 강국이라는 미명 하에 통신사, SI(시스템 통합) 업체들이 주도하며 망을 깔고 장비를 설치하는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초기 학술 논문들도 U-City라는 키워드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 거의 우리나라 사례만 나온다. 막대한 예산이 나올 수 있는 구실이 생겼고, 양적 성과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환경 분야에서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장비만 깔면 뭘 하나? 친환경, 지속가능성도 같이 해야지!. 그렇게 해서 몇 년을 다시 국가 연구 개발(R&D) 사업을 장식한 용어가 U-Eco City였다. 역시 엄청난 예산이 사용되었고 의미 있는 연구, 의미 없는 연구, 가능성은 있었지만 사장된 연구, 복지사업 같은 연구들이 수행되었다. 대학 캠퍼스 인근 식당들과 플래카드 제작 업체, 인쇄 복사 가게들은 최고의 수혜자였을 것이다.


그런 일들을 거쳐서 정권이 바뀌고 정부 부서명이 바뀌면서 스마트시티가 공식 용어로 되었다. U-Eco City이든 스마트시티이든, 그 외 온갖 첨단 도시 관련 연구들은 공통적인 연구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전의 다른 연구가 실패했다”라는 것이고 “지금의 도시는 여전히 멍청하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패의 가장 큰 부분은, "시민 체감이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U-시티 사업 이후 정부 주도의 스마트 도시 접근 방법은 <문제에 관한 기술 적용>이라는 것이었다. 미세먼지 문제가 있으면 미세먼지 농도 메시지 보드를 거리에 설치한다. 보안이 취약하면 CCTV를 설치하고 교차로에는 신호등과 속도계와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는 식이다. 그리고 보다 고성능의 신형 장비가 나오면 그걸로 교체한다. 자동차의 불법 주정차를 막기 위해서 스마트 연석을 설치하고 이들은 새로운 기술임을 뽐내며 강렬한 색상으로 표현된다. 소위 스마트 기술이 들어갈 만한 곳이면 이런 시도가 이뤄진다. 스몸비(Smombie)족을 위해서 신호등 외에도 건널목 경계에도 스마트 LED 연석이 설치되어 이내 도시의 시설물 지주대는 다양한 장치들을 한가득 수용하고, 주무 관청별로 이런 장비들을 여기저기 설치한다. 이러한 게임에서 누군가는 수익을 챙기겠지만 정작 시민들이 그런 무수한 시설물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는지, 정작 어떠한 효과가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스마트 기술의 비용과 효과는 스마트한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알려져야 하고 시민들은 그로부터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 더 나아가 시민들은 스마트한 자기 도시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고, 그러한 도시를 만드는 과정에 힘을 보탰다는 성취감을 느낄 필요가 있다.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도로시설물이나 서비스가 속출하는 현상 자체가 문제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충만한 서비스인지, 아니면 사람을 더욱 나태하게 하고 주위의 일상에 무관심하게 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도입되는 기술을 종합적으로 관리하고 방향을 제시할 방법은 없다. 어떤 사업을 하겠다고 예산이 확보되면 그저 어떠한 스마트 조크(Smart Joke)로 채워도 상관없는 것이다. 약간의 컴퓨터 기술만 사용되면 <인공지능>이라는 간판을 버젓이 달고, 한 줄 서기만 제대로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화장실의 상황을 디지털 워룸(War Room)처럼 만드는 기술 과잉의 스마트 조크는 도처에 범람하고 있다.


상상력 충만한 대가 감독이 영화와 같은 스마트 도시의 일상을 디자인하고 이를 솜씨 좋은 건축가나 예술가가 구현하면서 고품질의 엔지니어링이 지원하는 멋진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는 한 사람의 예술 작품처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사람들의 경험과 지혜가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저 IT 강국이니까 LTE 깔고 LED로 화장하면 모두가 감동할 것이라는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10억짜리 스마트 시설물은 5,000만 원으로 중소업체에 하도급되고, 사용자 경험 디자인(UX)에 해당하는 부분은 일이백만 원짜리 아르바이트에 맡겨진다. 시민 체감이 어려운 스마트 서비스는 이렇게 탄생한다.


K-콘텐츠가 넘쳐나는 이 시기에도 우리가 통상 내세우는 키워드가 IT 강국이다. 이 키워드는 이미 국뽕처럼 남용된다. 스마트라는 접두어가 붙은 사업은 넘쳐나는데 항상 속도와 용량으로 평가된다. 그 사고체계와 감수성으로는 이해도 평가도 안 되는 사업들로 넘쳐난다. 항상, 이번 사업은 기존 사업에서 모자란 인문학적 요소나 시민 체감을 높이고자 한다면서 그 성공 여부를 판단할 기준은 여전히 전신전화국 시절이다. 정성적인 평가가 불가능한 우리 사회에서 속도와 보급율, 저감율과 같은 지표 외에는 거대한 예산 투입에 대해 소신을 가지고 정당화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1년 정도 살아본 사람들은 한적한 교차로에서 우선멈춤을 하지 않았을 때 어떠한 불이익이 있는지 잘 안다. 평소에 잘 보이지도 않던 경찰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나타나 범칙금을 물린다. 미국에서 그렇게 잘 지키던 우선멈춤은 귀국 후 어느새 흐지부지된다. 스마트 도시는 이러한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고 한다. 준법정신의 고취나 시민참여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비싸고 소모적인 기술 적용을 자제해야 한다. 교차로의 <우선멈춤> 신호를 철저하게 지키는 것만으로도 교통사고는 획기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 대개, 스마트 리빙(Smart Living)이 스마트 기술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경제적이다.


초고속 통신 인프라를 갖추는 것은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사업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관이 주도할 수는 없다. 단기적인 효과는 뚜렷하지만 지속성은 없고 정작 시민들은 체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이 분 단위의 정시성을 가지고 운행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스마트함이다. 이러한 정시성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 기술의 역할도 중요하다. 버스가 정시에 운행되는 스위스 시계 같은 문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시에 운행된다는 정보를 시민들에게 적시에 알릴 방법이 없다면 그러한 정시성은 그 지역에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향유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정보를 가시화하여 도시의 문제나 작동 과정을 공유하고 공론화하는 것은 스마트한 도시를 만드는 핵심적인 방법이다. 그러한 방법이 우아하고 매력적이기 위해서는 건축가나 예술가, 그래픽 디자이너, 영상 아티스트 등의 역할이 필요하다. 창의적인 시민들의, 혹은 숨어있는 고수들의 참여도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은 협업과 시간과 돈, 프로토타이핑이 필요하다. 관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거나, 뻔한 예산으로 업자들에게 맡기거나, 애들 장난 같은 아이디어 공모작 시범사업으로 시민을 실험대상으로 삼거나 도시를 얄팍한 IT 기술의 흉물로 채우는 스마트 도시 사업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주어진 예산을 사용해서 공간을 눈에 보이는 뭔가로 채우는 것은 스마트함과는 거리가 멀다. 궁극적으로 스마트함은 시민들이 편리함(Convenience)에 대한 감사함(Appreciation)을 가지게 만든다. 이는 이 고마운 도시가 나의 도시라는 소속감 (Sense of Beloning)을 가지게 하고, 내가 이렇게 좋은 도시를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성취감 (We builit this city!)을 가지게 한다. 이로써 시민들은 보다 도시의 문제와 개선 방안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참여 시민(Engaged Citizen)이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도로의 컬러코드 유도선은 IT기술이 사용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놀랍게도, 아이디어를 만들어낸 공무워에게는 포상금조차 주어지지 않았지만 스마트 도시를 만드는 성공적인 사례이다. 지금은 지도앱이나 다양한 생활정보 앱으로 대중교통의 운행 정보를 편리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최초의 서울-경기 버스 운행정보 앱을 만든 것은 어떤 중학생이었다. 지자체의 공공데이터를 이용해 만든 앱을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지자체에서 그 데이터를 일방적으로 닫아버렸다. 내용인즉슨, 이미 어떤 업체가 시범사업이랍시고 웹기반의 버스운행정보시스템을 운영 중이었다. 너무 자주 있는 일이지만, 지자체가 준 눈물 같은 용역비는 개발비도 커버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잘 되면 추후에 사업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개발한 것 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자발적으로 만든 앱이 입소문을 타고 시민들에게 애용되기 시작하니 황당해진 이 업체는 지자체에 문제를 제기했고, 지자체의 '스마트'한 결정은 공공데이더를 막아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수시로 자행되고 있으며 우리가 스마트 도시라고 부르는 많은 비스마트한 사업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폼페이를 발굴하던 어떤 고고학자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인류가 이천 년 동안 별로 이룬 일이 없구나…" 화산재에 덮여 보존된 고대 로마인들의 일상은, 현대인의 일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으며, 도시를 구성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수레의 야간 운행을 돕기 위해 도로에 반사석을 설치한 당대의 기술자는 원로원 과학기술위원회로부터 '스마트 도로 시스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연구개발비를 지원받았을지도 모른다.


도시라고 하는 것은 항상 어떤 의미로든 스마트했었다. 먹거리가 꽤 되니까 여기저기서 스마트 도시 한다고 난리다. 스마트 도시가 원래 자기 전공이라는 이도 가끔 본다. 하지만 이건 특별한 학문이나 기술이 아니라 현상이다. 관계자 많이 만나보고 사례 몇 가지 접하면 누구나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있다. 자칭 전문가들은 스마트 도시를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혜성처럼 나타난 상품처럼 마케팅한다. 그러나 스마트함 자체는 기술의 층위(Layer)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식으로 생활공간에 오랜 세월 존재해 왔다.


와이파이, 초고속통신망, CCTV, 태양광 발전 등은 대개 스마트 도시 자체와 동일하게 포장된다. 그러나 기술이 제공하는 비즈니스 기회와 스마트한 생활은 별개의 문제이다. 엉성한 건축적 하드웨어 표면에 덧대어진 급조된 정보통신 기술은 처음에는 신기하고 유용해 보이며, 심지어 건축의 결함을 해결해 줄 마법의 망토처럼 보이지만, 이내 키치로 전락하고 애물단지가 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에 특별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너무 많은 급조된 스마트 서비스의 실험 대상이 되고 있다. 제대로 된 프로토타이핑(Prototyping) 없이 부처의 예산 처리 관행과 실무자의 비전문성에 기생하는 약장사들이 만들어낸 단발성 스마트 서비스가 범람한다. 건물의 외피가 움직인다고 해서, 미디어파사드가 화려한 야간 경관을 연출한다고 해서 건물이 스마트해지는 것은 아니다. 전력 생산을 위해서 태양광 패널을 이리저리 붙여서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한 건물이 스마트할 수도 없다. 소프트웨어랍시고 무슨 공연이며 디지털 콘텐츠를 집어넣지만 사실 그들은 문화와 이벤트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새로운 기술을 덧대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에 주목하고 기술을 숨기는 것이야말로 스마트한 도시를 만드는 필수 작업이다. 과거 기능주의 건축이 실패한 것은 그것이 기능적이어서가 아니라 기능을 상징하기만 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실제 기능하는 것보다 더 기능적인 것처럼 보였다. 마찬가지로 유사 스마트 도시는 실제보다 더 스마트해 보이기 마련이다.


지하철 객차 내에 통신사별로 마구 설치된 공유기들은 대개의 스마트 서비스가 시민들에게 얼마나 무례하게 제공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또한 스마트 서비스가 시민을 위한 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상임을 보여준다. 그저 기업의 이익과 편의만이 존재한다. 환경을 우아하게 만들고, 기술을 숨기고자 하는 미적 감각이나 공익적 교양은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이 과도하게 전면에 나서서 요란을 떤다. 그리고 설익은 기술이 누더기처럼 기존 환경에 덧대어져 충분한 테스트도 없이 실행된다. 시민들은 그러한 조잡한 서비스의 실험 대상으로 전락하며, 어느덧 흉물로 방치된 스마트 시설물들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지하철 역사의 다양한 디지털 안내 키오스크, 거리의 전자현수막,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데다가 철공소에서 대충 만든 것 같은 제설 용액 자동 분사기, 대로에 교수대처럼 늘어선 미디어폴, 난잡한 미디어파사드들, '나 이런 시설물이야'라고 대문짝만 하게 이름을 붙인 도로 차단시설물들, 모두가 이미 엉성한 도시환경에 디지털 누더기를 덧대는 사례들이다.     


<그림> 모 지하철 역사의 화장실 안내 시스템성찰이 부족한 디지털 만능주의는, 드레이퍼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용자(시민)를 고정된 틀에 가둬버리며 그 틀에서 사용자는 언제든지 대체가능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소위 스마트 화장실 안내 시스템은 '개그'로 승화된 테크놀러지적인 환경에 대한 맹목적인 지향성을 보여준다.>    


그보다 정교한 스마트 서비스는 어느덧 도시 생활의 필수적인 관문이자 족쇄가 되고 있다. 젊은이들에겐 편리한 수단이지만 스마트폰 앱을 이용한 사전 예약 서비스는 많은 디지털 소외계층을 모욕하는 경우가 많다. 불필요하게 과도한 기술을 적용한 지문인식 물품 보관함은 디지털 기술 취약자를 엿 먹이지만 제대로 작동하는 예도 드물다. IT 강국이라는 핑계로 기술 중독증이 범람하며, 눈먼 세금은 누군가의 배를 불린다.

몇몇 '살기 좋은 도시' 리스트의 상위 순위에 매년 단골로 오르는 도시들이 있다. 대학 순위평가나 소비자 민족도 지수 같은 함정이 있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순위다. 소확행, 휘게의 도시 코펜하겐이나 뮌헨, 취리히는 항상 상위 순위며, 빈은 거의 매년 1위를 차지하는 도시이다.


빈 같은 도시는 우리에겐 그저 음악의 도시로 인식되지만, 막상 빈을 한번, 두 번,. 가끔 방문해 보면,. 우선 장엄한 도시다. 20세기 초까지 한 때 서유럽의 수도이자 문화의 중심지로서 내뿜는 사뭇 장엄함이다.

그런 장엄한 문화유산을 가져서 시민들이 살기 좋을까? 우리보다 인터넷이 빠를까? 요즘 화제가 되는 의료시스템이 우리보다 나아서? 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는 것들이다. 하지만, 매년 여름이면 가족이나 연인끼리 쇤부른 궁전의 언덕에 자리를 펴고 앉아서 와인을 마시며 빈 필의 연주를 즐길 수 있는 그네들의 일상을 보면 절로 탄식이 나온다. "저 사람들은 정말 사는 것 같이 산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의 GDP가 더 많아졌다고 으스대지만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같은 도시의 저녁 무렵 그 흔한 테라스 카페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로제를 즐기며 황혼과 수다를 만끽하는 스페인 사람들은 항상 우리보다는 여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취리히 같은 도시는 개인 소유 차고에서 폐유를 흘리면 관할 관청에 신고해야 하고, 그 경우 관청에서 장비가 출동해서 땅바닥을 파내고 기름을 제거하는 친환경 강박증이 있는 나라이다. 알프스의 대기오염을 막기 위해 그들이 최근 개통한 고다드 터널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들 도시의 공통점은 그 지향점이 꼭 디지털이나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친환경, 커뮤니티, 기후변화대응과 같은 목표가 명확하고 그에 따른 철학과 일상 레벨에서의 실천이 상향적이다. 국가적 의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스마트 도시나 디지털 뉴딜로 1~2년 사이에 천문학적인 돈을 무조건 써야 하니 갑자기 사업을 만들고 수만 명의 스티브 잡스를 양성해야 하는 하향식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마트 도시는 대개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마트 도시를 구축하는 기업을 위한 것이다. 기업이 시민의 스마트한 삶을 위해서 우아한 스마트 서비스를 만들고 정당이나 무슨 시민단체가 스마트 도시에 매진하겠다는 소리를 믿는다면 굉장히 순진한 것이다.


반면에 아시아 쪽의 스마트 도시 지수는 주로 고속통신망, 지능형 쓰레기 처리, 행정전산화와 같은 IT 기술 적용에 방점을 두기에 우리나라의 소위 U-City를 포함한 도시들이 주요 카테고리의 수위를 차지한다. 기분 나쁜 일은 아니지만, 가끔 기능 올림픽 순위의 아이러니가 생각난다. 기능 올림픽 종합성적은 항상 1등인데, 건물의 문짝은 늘 덜렁거리고, 타일의 줄눈은 맞지 않고 세면대 수전의 위치는 상식 밖이다. 제대로 된 컬링 경기장 하나도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컬링 선진국 일본을 꺾었다. 기적이다. 일본은 시민이 즐길 수 있는 컬링 경기장이 100개도 넘는데…. 그리고 또 기적에 감동한다.


피겨스케이팅 중계를 하면서 항목별로 점수를 세며 국민에게 알려주는 천박한 점수 콤플렉스 덕분인지, 남들은 참여해서 그냥 즐기는 국제행사에 국가 프로젝트 위원회를 구성해서 죽기 살기로 전시품을 내고 꼭 무슨 상이라도 받아야 하는 독특한 촌스러움 덕분인지, 스마트 도시의 순위 또는 무슨 세계 최초 스마트 시설물 설치에 그렇게 목을 맨다.


국가적으로 스마트 도시 사업의 개입은 좀 더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싱가포르 같은 나라의 건설 분야 국가 연구·개발 로드맵을 보면 살짝 감탄스러울 때가 있다. 목표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XX년까지 도심의 온도를 몇 도 낮춘다. 이것이 목표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 방법론, 기술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로드맵은 수단이 되는 기술이 너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작성자의 사심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관이 해야 할 역할은 선의의 목적에서 창의적인 개인들에 의해 시작되는 일이 비즈니스를 창출할 수 있도록 생태계를 조성해야 하는 것이다. 관이 나서 실적에 집착하고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면, 서울시 홍보문구처럼 안 봐도 비디오이다. 엉터리 업체들이 주요 공공기관을 등에 업고 눈먼 돈을 낭비하는 스마트하지 않은 시설물들을 보자. 디지털 화장실 상황 안내 시스템, 지문인식 스마트 물품 보관함…. 기술 과잉 중독이거나, 작동하지 않는 쓰레기가 대부분이다.


재래시장의 입구를 미디어파사드로 장식한들, 정작 결제 시스템과 온라인 시장이 같이 따라가지 않으면 그냥 불편하고 경쟁력 없는 재래시장일 뿐이다. 생산공정과 유통 시스템이 같이 연계된 생태계 없이 가로 한구석을 차지한 비정형 도로시설물은 그저 흉물스러운 전시행정일 뿐이다. 인증 서비스가 사용자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계 인허가 시스템에 등록하거나 연구관리 시스템에 등록하면 누구나 인생이 허무해지고 숨어있던 욕쟁이 래퍼 재능을 깨닫게 된다. 스마트함이라는 핑계로, IT 강국이라는 자기 주문에 평화롭고 우아한 일상이 오히려 탈취당하는 사례는 허다하다. 그런데 그런 성과를 우리는 총체적으로 스마트 도시라고 부른다.


창의적인 개인의 스마트한 아이디어들이 쉽게 구현되고 사업화될 수 있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아울러 기존의 기술이나 서비스를 버무려서 새롭고 우아한 서비스를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기게 할 수 있는 환경은 스마트 도시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도시형 스마트팜이 연계된 고급스러운 샐러드 전문 레스토랑과 같은 비즈니스 아이디어는 젊은 세대들을 지역 경제의 주인공으로 초대하는 사례이다. 팹랩이 정말 제대로만 활용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결국 스마트 도시는 스마트한 사람들이 모여들게끔 하는 매력들로 가득한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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