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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Mar 24. 2022

영영 이별 영이별

눈비 내리던 초봄의 이별, 그 짧은 기록.




3월 13일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병원 응급실로 모셔졌다. 응급처치 상황에 대한 CCTV열람과 간단한 경찰 조사가 있었다. 사망진단서를 기다리는 사이에 빈소와 화장장을 예약하고, 장례 절차를 결정하고 용품을 골랐다.

고령층 사망률이 높은 환절기에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 급증까지 겹쳐 화장장 예약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5일장을 지내게 됐다. 더러는 6일장, 7일장을 지내는 집도 있다고 했다. 화장을 포기하고 매장을 택하는 집도 있단다. 여기저기 시끄러웠다.

하루가 순식간에 갔다. 슬퍼할 겨를도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았다.




3월 14일

엄마에겐 이제 엄마가 없다.

엄마가 할머니께 전화를 걸 때면, 항상 특유의 톤과 투로 "엄마." 하던 부름이 듣기 좋았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두 글자의 짧은 리듬. 이제는 엄마가 "엄마." 하고 불러도 대답해 줄, 돌아봐 줄 사람이 세상에 없다.




3월 15일

본래대로라면 출관을 했어야 하는 날에 입관을 했다.

입관이 예정된 3시보다 일찍 온 성당의 신자들의 연도 소리가 분향실에 가득했다. 나는 바깥 의자에 앉아 그 느릿한 곡조를 들으며 멀리 복도 끝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날이 흐렸고, 시계를 보니 2시 41분이었다.

영영 2시 41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분침과 시침이 못박여 시간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할머니를 관에 모시고, 네 귀퉁이가 꽉 들어맞도록 덮개를 닫는, 그래야 하는 3시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 외가는 딸이 귀했고, 역시 내 항렬에서 딸은 나 하나였다. 삼촌들도 그랬지만, 할머니는 나를 정말 예뻐하셨다. 그런 할머니께 나는 죄송한 일이 너무 많아서, 차마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 내내 울기만 하다가, 할머니에게서 물러나야 할 때가 되어서야 팔목 어디 즈음을 붙들고 작게 말했다.

"할머니. 잘 가. 미안해."




3월 16일

어제 입관 후 저녁에 빈소를 정리했다. 할머니를 병원 안치실에 두고, 가족들은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다음날 발인을 예정에 둔 하루는 빠르고도 느리게 흘렀다. 밥을 먹고 호수 근처를 걸었는데, 바람이 꽤 찼다. 요 며칠 간 비가 내리고 쌀쌀한 날씨에 할머니는 어디까지 가셨을까.




3월 17일

어두컴컴한 새벽에 집을 나섰다. 비가 흩뿌리는 날씨에 영정과 위패와 관을 모셨다. 화장이 끝난 화로에는, 이 세상을 살다간 어떤 존재라고 믿을 수 없는 한 줌의 유골과 그을린 의료용 나사가 남아 있었다.

몇 년 전 심한 허리디스크로 수술을 받으실 때 삽입했던 것이었다. 수술 전 MRI촬영 후에, "그 커다란 기계에 들어가니 천둥이 꽝꽝 울려대고 아주 무섭던데, 혜리 그 어린 것이 그때 얼마나 무서웠겠니." 하시며 나의 오래된 투병을 그때까지도 마음에 걸려하시던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벽부터 커다란 운구 버스를 타고 무겁게 병원을 나섰는데, 국립묘지에 계신 할아버지 곁에 할머니를 두고 돌아오는 길은 너무 가벼웠다.

한 사람만큼의, 한 인생만큼의 무게가 덜어진 탓이었다.




3월 18일

부의금 내역과 지출을 셈하고 쌓인 영수증을 정리했다.

산 자의 남은 일이란게 고작 이랬다.




3월 19일

삼우제 날, 눈이 내렸다.

눈길을 달려온 가족들이 모두 모여 간단히 인사를 올렸다. 오는 길에 소박한 식사를 하고, 언제나 그랬듯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헤어졌다.

우리는 다시 한 차례의 이별을 겪어냈다.




3월 21일

우리의 이별에도 세상은 여전하다.

우리가 어떤 슬픔과 아픔을, 어떤 기쁨과 환희를 겪을 지라도 세상은 나아가고 시간은 흐른다.

무심하게도, 그리고 야속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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