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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Nov 10. 2021

'Fig Campagne'와 '명예회손' 사이에서.





영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한국어로 써도 되는/써야 하는 걸 죄다 영어로 써놓고 독해를 강요하는 세상이 됐다. 화장실을 Toilet이나 Rest room으로 표기하는 건 이제 양반이고, Americano나 Latte는 일상어 수준이다.



카페 진열대 앞에 서면 '무심한 듯 시크하게' 필기체로 쓰인 영어 메뉴들이 나를 빤히 본다. Pecan Caramel Crumble. Fig Campagne. Strawberry Pan Doro. Custard Cream Croassant. Parsley Garlic Crowaffle……. 가장 잘 나가는 품목 옆에는 조금 더 굵은 글씨체로 Signature Menu라 쓰여 있다.



다들 그게 당연한 듯 여긴다. 새로 생긴 카페와 빵집에 가면 너무 당연하다는 듯 온갖 영어가 만연하다. 여기가 미국인지 영국인지, 네이티브가 운영하는 카페인 건지, 그래서 메뉴를 읽고 주문하려면 토익 점수라도 들고 와야 되는 건가 싶을 만큼.



영어가 체화된 사람이 아니고서야 메뉴판과 안내문에 가득한 영어를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솔직히 나는 'Fig Campagne' 따위의 이름을 영어로 읽고도 나도 모르게 해석의 과정을 거쳐 한국어 이름으로 재인지한다. 심지어 정말 생소한 빵을 봤을 때는 모양을 보고 추측으로 뜻을 넘겨짚은 때도 있었다.



과연 나만 그럴까. 감히 넘겨짚어 보건대, 나 같은 사람이 소수는 아니리라 생각한다. 학창 시절 내내 영어를 배운 젊은이라 한들 그게 실생활의 영어 실력과 곧장 이어지지는 않을 뿐더러,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에 걸쳐 영어와 가까워질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 또한 분명 적은 수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영어는 이토록 대단하고도 일상적인 대접을 받으며 우리의 생활 곳곳에 침투하는 걸까?



'명징'과 '직조'를 몰라서 왜 그렇게 어려운 단어를 쓰냐고, 그런 단어로 감상을 표현하는 건 지적 허영심일 뿐이라고 화를 내던 세상이다.(이동진의 영화 <기생충> 한 줄 평 사건) 3일간의 휴일을 '사흘 연휴'라고 쓴 기자를 향해 '3일 연휴인데 왜 4흘이냐 숫자도 못 세냐' 비난이 쏟아졌던 세상이다.(2020년의 광복절 연휴 사건) 그뿐인가. '2틀' '뒷자석' '명예회손' 따위의 잘못이 흔한 세상에서, 그를 지적하면 '너만 잘났냐'라는 반응 또한 흔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영어의 남발은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모르면 부끄러워하고 대충 아는 체라도 하며 얼렁뚱땅 넘어간다. 영어 앞에서 '나는 영어 잘 몰라' '왜 이렇게 다 영어를 쓰는 거야?' 하는 솔직한 인정과 당연한 의문은 찾아보기 어렵다. 고유어도 잃고 맞춤법도 잃고 국문에 대한 맥락까지 잃어가는 세상이 어떻게 영어에는 이렇게 관대한지 모르겠다.



빵 진열대 앞에 삼삼오오 모인 어르신들이 속닥속닥 말씀을 나눈다. '아유 무슨 빵인지 모르겠어 그냥 모양 보고 골라' '아이 물어보지 마 창피하게 그래' '젊은 사람들 오는 데라서 그런가 봐'. 왠지 면구스러운 듯 쉬쉬하며 빵을 고르시는 어르신들의 뒷모습을 본다. 세상이 참 막막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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