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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그릇 Oct 01. 2023

#7. 글쓰기는 평평해지다가 결국 소멸해가는 것

어느 날, 제주 어느 북 큐레이션 바에서, 어느 화분의 풍경


글쓰기는 나를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굴곡 많은 감정이 균형감을 갖고 솟아나는 의심이 가라 앉는다.

목적지를 모르고 나대던 방향키가 비로소 목표점을 찾는다. 마음 속 파도가 잠잠해지고 순탄한 항해를 시작한다. 글쓰기는 그렇게 나를 평온하게 만든다. 공연하게 인연의 짧고 긴 장단 (長短, length)을 재거나 좋고 나쁨의 장단 (長短, pros and cons)을 재는 일도 줄어든다. 글쓰기는 갈수록 명상 작업처럼 나의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그토록 몰아치던 내적 폭풍이 유유히 강도를 낮추고 이내 폭풍의 눈 속처럼 고요해진다. 마음 속에 일정한 경계가 생기고 뚜렷해진다. 더 선명해지는 것은 모든 건 이렇게 또 지나가리라는 의식(意識, consciousness). 고통스러울 때 글을 쓰며 나를 달래는 과정이 의식 (儀式, ritual)처럼 자리를 잡았다.


이 글을 쓰면서 장단 (길고 짧음과 좋고 나쁨)의 한자어가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글쓰기는 정보의 탐색과 상식의 확장을 돕는다.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는 일임에도 누구는 이미 알았을 기본적인 정보를 하나씩 알게 되는 이런 기쁨도 적지 않다. 이미 시든 줄 알았던 포도알을 하나 하나 음미하는데 여전히 신선한 것을 발견하는 기쁨.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 줌파 라히리>의 책을 읽으며 이탈리아어로 '희미해지고, 엷어지고 증발하고 분해되다가 결국 사라지고 소멸되어 끝난다'여러 단어들을 발견했다. 나와 어떤 접점도 없는  이탈리아어, 벵골어와 영어 두 언어의 경계선에 있는 이방인 줌파 라히리는 이 낯선 언어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 10년이 넘는 세월을 이탈리어와 뒹굴며 결국 이탈리아어로 단편을, 글을, 책을 쓰게 되었다. 결국 희미해지다가 증발하여 끝나게 되는 지상의 모든 것들의 섭리를 받아들여야 할 때 차라리 이런 낯선 단어들의 나열이 위로가 된다.


sbiadire - 희미해지다

sfumare - 엷어지다

evaporare, svaporare, svampire - 증발하다

dissolversi - 분해되다

dileguarsi - 없어지다

scomparire, perdersi - 사라지다

svanire - 소멸되다

finire - 끝나다


존재의 무존재감이 어느 때보다도 깊숙히 다가오는 이 계절에 이때껏 겪어 보지 못한 형태로 나는 상실감을 겪고 있다. 나의 딸들이 내가 낳은 자녀 둘이 나의 새로운 직장으로 매 주말마다 만나기 어려워진  일정 때문에 당분간 나와 지내지 않겠다고, 아니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44일 째이다.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낳은 나의 자녀들이 내게 전한 거부와 거절. 가히 기쁨으로 즉시 상쇄되었던 출산의 고통과는 다른, 세상에 나온 아이의 탯줄을 내게서 떼어낼 때와 전혀 결이 다른, 살점같은, 심장 크기만한 덩어리의 피붙이들이 생으로 떨어져 나가는 경험 그 자체이다.


이 사실이 내 일상에서 도저히 소화가 되지 않아 일상 속에서 나의 예민함은 묵직한 체끼처럼 머물고 누구에게는 시시 때때로 뾰족한 형태로 튀어나온다. 특히 나의 가까운 이에게 독기를 품은 말들로 튀어 나가 버리고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악한 기운을 주고 난 후에 도리어 내가 종일 괴로움에 시달린다.


한국인으로서 일반적이거나 평범한 프레임이 나의 결혼 전 연애와 결혼, 그리고 그 이후의 삶, 별거, 이혼까지 적용되지 않은 탓일까. 나는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깃털이 아닌 족쇄처럼 느껴지며 책임감보다는 회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들을 돌봤던 것 같다. 결혼과 육아로서 미혼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저당잡혔다는 의미와는 구분되는 묵직함이다. 책임감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나는 아마 책임을 피하고 싶은,  사회적 요구로서의 좋은 엄마라는 패러다임을 일구기 보다 내 식대로 편하게 키우려는 반항심이 앞선 편이라 그럴 수 있겠다. 아이들은 분명 기적같은 존재들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에게는 과분한 아름다움으로 느껴졌다 할까. 엄마가 된 이후로 면면히 살펴보았던 건 자신의 욕구와 꿈을 뒷전으로 하는 희생과 헌신의 아이콘 '좋은 엄마' 기준에 부족한 나의 모성애. (이건 내가 정의하는 정의일 뿐이지만)


나는 임신을 축복으로 여겼지만 연년생 출산과 육아로 엄마로서의 낮은 자존감, 육아 스트레스와 출산후 증후군에 시달리며 내가 보는 나는 언제나 부족함의 총체, 결핍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내 딸들이 내가 경험한 나의 결핍을 어느 정도 간접 경험했던 것일까. 딸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대체 어떤 무가치함이었길래, 어떤 가벼움이었길래, 어떤 무존재감이었기에 나를 이토록 거절하고 있을까.


아빠의 나라이면서 자신들의 반쪽 나라인 미국, 그러니까 훈육 중에도 엄마가 소리를 잘 지르지 않는, 잘 타이르는, 부드럽기 그지 없는, 때로는 냉정하면서 온화한 듯 하지만 뜻을 알 수 없는 듯한 미묘한 표정과 그 속내를 가진 미국 문화에 더 가깝게 물들어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나의 서운함은 형용할 길이 없다. 아이 아빠의 성정은 사실 부드럽고 냉랭하면서도 온화하고 차가웠다. 한번씩 화를 낼 때의 모습은 가히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눈빛의 날카로움과 살기 어린 그것이었으며 그렇게 한번씩 치솟는 용광로같은 분노를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내가 그를 자극을 했든 하지 않았든 나를 향한 분노라고 알고 있었기에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그 분노가 아이들을 향하지 않도록 어린 두 딸을 업고 안고 4시간 거리의 친정으로 즉시 도망을 갔다. 한껏 몸을 움츠리고 숨거나 도망가지 못하였을 때는 23센티 이상 큰 그를 향해 득달같이 대들기도 하였다. 온 힘을 그러 모아 나를 지키려 애를 쓰면서 그에게 더 날카로운 가시를 내세웠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더 상처낼 수 없을 만큼 다다랐을 때 6년 간 함께 쌓아올린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부수어 버렸다. 만나서 함께 산 지 6년만에, 그리고 이젠 헤어진 6년 차이다.


엄마의 태내에서부터 시작된 유기 불안을 어떤 식의 관계 속에서든 거듭 경험하고 있는데 나의 자녀들로부터 겪게 되는 이 고통이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되뇌일 수록 나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를 누리고 내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대안이라면 그 자유와 행복은 말 그대로 타당한 건지. 나의 자유와 행복을 저당잡혀도 좋으니 다시 버려지고 싶지 않은 깊은 곳의 외침을 글로나마 써내려간다. 생생함을 넘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 고통도 소멸하게 될까. 희미해지다가 다시금 어떤 동기로 자극되어 선명해지지는 않을런지. 그건 내 심리적 건강함과 관련이 있는 걸지 나에게 물어본다. 불안에 기초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문일 거라 위안해본다.


나는 오늘은 어제보다 평평해졌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평평해져가겠지. 그렇게 평평해지다보면 결국은 납작해져서 흙에 가까워지고 소멸하겠지.


썩 나쁘지 않다.


이렇게 글을 쓰며 평평해지고 소멸해가는 일,

내가 나를 일으켜서 꾸준히 해 나갈 운명과도 같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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