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그러나 이제까지 없었던 형식의 아우슈비츠 영화이다. 아우슈비츠를 다룬 많은 문학과 영화들이 있어 왔지만 하나같이 재현의 한계 혹은 미학적 환원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슬라보예 지젝은 홀로코스트의 공포란 재현될 수 없는 것이라 말했다. 그럼에도 이는 잊혀지지 않기 위해 재현되어야만 하는데, 지젝은 오직 트라우마적인 방식, 즉 비논리적이며 정합성 없는 형식으로써만 재현 가능하다고 보았다. 묘사하려 하면 할 수록 그 묘사가 담아내지 못하는 실재의 공포는 밀려날 수 밖에 없기에, 오히려 작품속에 서사의 구멍, 트라우마를 남김으로써 그 공포의 출현을 경험되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바로 지젝이 기다리던 트라우마적인 작품이다. 시작하자마자 대략 3분간 블랙 아웃 상태에서 기괴한 사운드가 흘러나오는데 이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형식이다. 이미지의 세계와 그 너머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장벽. 그리고 그 틈에서 히스테리처럼 새어나오는 온갖 불협화음들.
영화 속 배경은 루돌프 회스라는 이름의 실존했던 인물의 집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인 그와 그의 가족들은 수용소와 높은 담벼락을 공유하는 아름다운 저택에서 안온한 삶을 산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꽃 핀 담장 뒤편으로는 소각장의 연기와 비명소리 같은 것들이 하나의 배경으로서 존재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독특한 형식은 '서사의 부재'이다. 회스의 전출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있긴 하지만 이마저도 전혀 극적이지 않으며, 인물들과 장면들은 좀처럼 하나의 서사로서 꿰어지지 않는다. 끊어지고, 끊어진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 사이 사이 구멍들로부터 어떤 정동을 느끼기도 하고, 그 틈으로 상상이나 의미를 주입하기도 하는데, 이 때 영화는 N개의 효과로 현상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실재를 경험하는 과정이 바로 이와 같다. 인간은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살아간다. 물질들과 감각 오성들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언어와 의미로 구조화된 상징계는 이를 어떤 '이미지'로 받아들이게 한다. 모든 이미지란 이미 개념화되고 해석된 현상인 것이다. 하지만 촘촘한 상징계의 매트릭스에도 구멍은 존재한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생활세계에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마주하는 경험을 재현해 낸다. 죽음의 공포든, 예술적 감응이든, 신이든 간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구멍을 보이는 것.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나온다. 바로 회스가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다 무언가를 보고 구토를 하는 장면인데, 이러저러한 해석을 달 수 있겠지만 이 장면을 대하는 가장 좋은 자세는 역시 말하지 않는 것이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겠지만,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양 살아가는 이들이 세계를 지배한다. 회스와 'the zone of interest'는 바로 우리 세계의 표상이다. 잉여 자본이란 반드시 불공정한 교환과 착취로부터만 발생 가능한 것이다.
오늘 내가 안온하다면 그건 저 장벽 너머의 고통에 빚졌기 때문이다. 대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가자지구 뿐만 아니라 전세계 1억 난민의 비명 소리는 살아있는 실재이지만 매체 상의 숫자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로 모조리 환원되고 만다.
아우슈비츠를 다루는 가장 훌륭한 방식의 영화이자, '숭고'를 경험했다고 할 만큼 미학적으로 압도적인 영화를 보았다. 아니 체험했다. 아카데미 수상작이라는데 분명 영화사에서 오래도록 회자될 것 같다. 산드라 휠러의 연기는 보너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