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규영 Jul 04. 2024

<아버지의 광시곡> 조성기

2024-06-29

<아버지의 광시곡> 조성기

"내가 끈질기게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한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사랑받는 아픔을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사랑받는 아픔."
-

부산 지역 교사노조 위원장이었던 '아버지'는 5•16 쿠데타 이후 '똥통에 빠진' 삶을 살았다. 사상검증으로 잡혀가 형을 살고 교사직을 박탈당한 아버지는 과외방을 운영하며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지만, 큰아버지의 사업빚으로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다. 사회적 지평에 이어 물질적 지평 마저 상실한 아버지는 이제 오롯이 술로 삶의 무게를 감당한다. 그게 스스로 벗겨지기 전까지.

화자이자 작가인 아들 성기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성적으로 아버지의 강박적 기대에 충실히 보답한다. 경기고로 유학을 올라오고,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기까지 그는 아버지의 무너진 자존심을 세워줄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학시절을 보내고 도달한 곳은 아버지가 바라던 영광과는 전혀 상관 없는 세계였다. 이름하여 선교단체.

헌신한 예수쟁이가 된 아들은 결혼을 삼일 앞두고 통보하는가 하면 누이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으며 아버지와 경계 지어진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경계는 불현듯 찾아온 아버지의 병과 죽음으로 인해 영원에 이르고 만다. 10•26 사태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따르지만 모든 사건들이 극중 화자인 작가의 기억에 기반한 것으로 그의 자서전이자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이나 다름 없다. 작가의 전 작품들에도 아버지 이야기가 이따금씩 등장했다고 하니 작가는 오랜 세월동안 글로써 그 나름의 애도를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자크 데리다는 진정한 애도란 '불가능한 애도'라 말한다. 누군가를 잊기 위해,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애도는 결국 그가 애도하고자 한 타자의 존재를 세계 속에서 지워버리고 만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다. 데리다에게 애도란 상실한 존재를 낭만화/악마화하는 등 한 줄로 일축하거나 관념으로 추상하지 않으며, 일상의 기억에서 몰아내는 대신 상처와 흔적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애도는 성공이다. 작품 속에서, 그 너머에서 아버지의 혼은 살아있는 것이다.

문학을 읽다보면 지방은 80년대, 서울의 경우 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내가 산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이는 내가 생각하는 국내 작가들의 시대적 경계선과도 일치하는데 <아버지의 광시곡> 속 장면들을 보며 그 선을 다시 한번 체험했다. 작가를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이들이 아버지와 느꼈을 거리감도 아마 근본적으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일 테다.

사람을 세계-내-존재라 한다면 나와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았던 이들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의 사랑을 거부하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 사랑에는 아픔이 따르기 때문이다. 두 세계가 충돌하는 데서 오는 지독한 아픔. 만약 그렇다면 자식들은 이미 살아서부터 애도를 하고있는 게 아닐까. 타자로 온전히 남겨둔다는 점에서 그건 진정한 애도일지는 모르지만, 살아있는 이에 대한 애도란 불효일 수 밖에 없겠다.

<아버지의 광시곡>을 읽으며 부모님의 삶과 시대를 짐작해 본다. 그리고 기억 어딘가에 흩어 존재하는 젊은 아버지의 장면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내 아버지의 랩소디다.

#아버지의광시곡 #조성기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레이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