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서 잊는다고! 너는 내 존재의 일부야. 나 자신의 일부야. 거칠고 천한 소년이었던 내가 처음 여기 온 이래로, 너는 내가 읽는 글 한 줄 한 줄마다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어. (중략) 너는 내 마음이 그 후로 알게 된 모든 아름다운 상상의 화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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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문학들이 아직까지 고전으로 특별히 많이 읽히는 까닭은 근대말이라는 시대적 분위기와 더불어 그 압도적인 사상적 넓이에 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니체가 태동하였으나 아직 구조주의, 정신분석, 비판이론, 실존주의와 같은 문학 사조들이 분화되기 전 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은 하나 하나의 책마다 그들의 모든 경험 세계를 눌러 담은 것이다. 천 페이지에 달하는 <위대한 유산>을 읽으며 디킨스가 남긴 빅토리아 시대의 독특한 정동을 경험해 보았다.
순수하고 여린 마음씨의 소년 핍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누나와 매형의 집에서 자란다. 누나의 갖은 폭력에도 따뜻한 매부 조의 우정과 사랑으로 소박하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내던 필립은 어느 날 우연찮은 기회로 마을의 거부였던 미스 해비셤의 집에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그날 처음 만난 또래 소녀 에스텔러에게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만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필립은 매부의 도제공이 되어 대장장이 일을 배워나가는데 마음 한켠에는 수치와 사랑을 계속 간직한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이 예상치 못하게 거대한 유산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런던으로 올라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신사가 된 필립은 이제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고 신사로서의 품위와 교양에 맞는 생활을 하며 속물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시간이 흘러 그의 앞에 후견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필립은 그제서야 자신이 대단한 착각을 했음을 깨닫게 되고 그의 삶은 다시 추락하기 시작한다.
<위대한 유산>의 원서 제목은 'Great Expectation' 이다. 그러고보면 이 책은 에스텔러를 다시 만날 날에 대한 기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을 날에 대한 기대, 신사가 될 기대, 에스텔러의 연인이 될 기대, 그리고 그 모든 기대가 무너지는 사건, 다시 그의 후견인과 외국으로 탈출해 새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기대, 어릴적 친구 비디와 단초로운 삶을 꾸려갈 기대, 또 다른 깨어짐, 마침내 수용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기대와 좌절을 겪으며 필립이라는 이름의 영국인이 성장하는 변증법적 드라마라 볼 수 있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란 욕망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대상은 필립의 삶에서처럼 수 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욕망의 기원이다.
헤겔은 인간 자의식을 끊임없는 인정투쟁의 과정으로 보았다. 하이데거를 따라서 인간은 무엇을 '향해 있는 존재'일 수 밖에 없는데, 대개의 경우엔 일상과 그 주변 세계를 향해,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향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향성은 그의 시간과 공간 지평 모두에 펼쳐 있다. 세계-내-존재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존재는 오롯이 그의 것인 게 아니라 그를 구성하는 세계의 것이기도 한 것이다. 즉, 모든 존재자는 그를/그가 향해있는 세계로부터 공간을 점유하지 않으면 존재 불가능하다. 다른 말로 인간은 인정 없이는 살 수 없다.
이 때문에 타자로부터 내 세계가 부정 당하는 경험이나, 내 세계를 이루는 존재자의 상실은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다. 전자의 경우를 '수치', 후자의 경우를 '멜랑콜리'라 말할 수 있다.
수치를 입은 자아는 방어기제를 세우는데, 라캉을 따르면 먼저 그의 결핍된 존재는 이전에는 없었던 (그로인해 수치를 당했다고 여기는) 욕망을 낳게 된다. 또한 동시에 그에게 수치를 안겨준 타자는 그를 '응시'하는 대타자자로서 그의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순전무구하고 소박했던 소년 필립이 에스텔러를 만나고나서부터 '신사'가 되고자 갈망하게 된 것과, 그의 대장장이 삼촌 조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한 것이 이를 잘 설명한다. 욕망이 생김과 동시에 일거수 일투족 에스텔러의 '응시'를 내면화하여, 그녀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게된 것이다.
신사의 세계를 내면화하여 살아가던 필립은 그의 삶에 두 번째 결정적인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존재의 위기를 경험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가 비정하게도 저버렸던 매부와 조를 에스텔러의 자리에 놓는다. 오랜 세월 그를 짖누르던 죄책감으로부터 구원받아 마침내 그가 떠나온 고향으로 그의 욕망이 '회심'하게 된 것이다.
필립을 신사로 만든 엄청난 부가 그가 받은 첫 번째 유산이라면, gentle good man이 되게한 프로비스의 무한한 애정과, 그의 헌신은 두 번째 유산이었던 것이다. 물론, 조의 용서와 포용, 허버트의 우정과 지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출발이 된 어린 필립의 순수한 마음이 없었더라면 모두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계-내-존재는 서로를 향해 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가는가? 누구의 '응시'를 가지고 사는가? 내게 남겨진 트라우마의 기원은 어딘가? 이 질문에 대한 답에 우리가 상속받게 될 세계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