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충분하고 온전한 이해도 충분하지 않고 온전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묶던 아버지, 자기를 향해 칼을 내리치려던 아버지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에 그는 질문을 멈출 수 없었고,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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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실존주의의 대가 키에르케고르가 아브라함의 믿음 사건을 그의 철학적 작업 중심에 배치한 이래로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은 문학 세계 속에서 다양하게 소환되어 왔다.
아브라함의 믿음 사건이란 고대 중동의 유목민이자 족장이었던 아브라함이 신의 명에 순종해 노년에 기적적으로 낳은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었던 사건을 말한다. 이삭을 제단에 올려다 놓고 칼을 빼든 순간 아브라함은 신에 의해 제지당하고, 이삭은 극적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사건으로 그의 믿음을 인정받고 후대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이라는 공통의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모든 실존주의 문학에는 공통된 문학적 장치가 존재하는데 이는 바로 '뿌리 뽑히는 경험'이다. 인간은 그 정의부터가 사회적 존재이다. 모든 인간은 거주할 집, 함께하는 가족, 일터 등 어딘가에 뿌리 내리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자의든 타의든 뿌리 내리지 못하는 이는 그의 인간성을 위협받는다. 그러나 어떤 곳이든 영원한 토대는 없기에 모든 인간은 결국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인간실존이 바로 이 불안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불안을 느끼는 순간이야 말로 그의 삶을 기획 투사할 수 있는 순간이며 실존 존재로서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인 것이다. 이제 그는 '빠져있는' 존재가 아닌 현존재이다. 같은 맥락에서 키에르케고르에게 믿음이란 실존적일 때만 살아있는 신앙이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에게 내린 신의 명령은 그의 모든 토대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부성애 마저 뿌리 뽑힌 아브라함은 이 세계의 모든 토대로부터 도약해 신 앞에 단독자로 선다. 과연 그의 순종은 현신앙이요 살아있는 믿음이다. 그리고 비로소 그의 본향은 그가 떠나온 땅이 아니라 신의 세계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같은 지점에서 실존 신앙의 윤리적 한계가 있다. 신과 나만 있는 세계에 다른 존재자의 실존은 없는 것이다. 신의 시선이 다른 모든 시선을 압도하는 아브라함의 실존 앞에서는 더이상 인정투쟁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염소나 이삭이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자면 '타인'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지옥이다.
이승우 작가는 아브라함의 믿음 사건에서 희생제물로 철저히 대상화된 사람 이삭을 조명한다. 머리로는 그 '대의'를 수십번 이해했어도 자신을 죽이려 칼을 쳐든 아비의 얼굴은 분명 이삭의 뇌에 외상을, 그의 마음엔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이다. 이 책에서 이삭의 히스테리는 참을 수 없는 식탐과 끝 없는 허기라는 증상으로 표상된다. 염소 요리에 눈 먼 이삭의 히스테리는 그의 아들 에서에게로 상속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살해할 뻔한 그 사건은 어떻게 평가해야 마땅한가? 이삭에게는 사악하고 사회적으로는 불의하나 신앙적으로는 옳은 일이었다. 신앙적으로는 옳으나 사회적으로는 불의하고 이삭에게는 사악한 일이었다.
모리아산과 소돔의 세계 양쪽 모두에 발 디디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신앙인에게는 정답이란 없다. 모름지기 모순성이야 말로 신앙의 필연이며, 그 삶이란 다만 끝 없는 부정과 회개가 이어지는 변증법적 여정이다. 선악은 세계 저편에 있으며 신은 인간의 문법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루지 않았지만 책에 등장하는 소돔성의 롯, 광야로 내쫓긴 모녀 하갈과 이스마엘, 장자권과 축복을 동생에 빼앗긴 에서와 성서 속 다른 수많은 타자들의 삶 역시도 분명 건너 뛸 수 없는 사건 텍스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 사회적 신의를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 타자들의 얼굴로부터 신의 또 다른 윤리적 명령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다.
문학을 읽으며 신앙과 교회를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 글은 아쉬웠지만 시선이 다했다. 해석적 글쓰기. 모처럼 독특한 책을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