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참 운이 좋지?” 어느 날 밤 펄롱이 침대에 누워 아일린에게 말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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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면 오랫동안 생각날 것 같은 작품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1985년 겨울 아일랜드의 한 작은 마을. 빌 펄롱이라는 석탄 배달업자가 우연히 수녀원의 부조리를 알게되고, 그곳에서 한 소녀의 요청에 머뭇거리고 번민하는 며칠 간의 이야기다.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상처와 책임과 환대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내용은 평범하다고 할 수 있지만 보기 드문 중편인데다 군더더기 없는 표현과 절제된 서술이 책에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역시 훌륭한 작가는 가장 적절한 형식으로 이야기를 담아낸다.
선은 혼란스럽고 머뭇거리는 가운데 존재한다. 양심의 소리 혹은 타인의 얼굴 앞에서 우리가 주저하고 괴로워하는 순간에 윤리가 있다. 선이라는 개념이 과연 신에게서 왔다면 몇 마디 말로 간단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의 선택으로 손쉽게 갈음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책에서 펄롱이 소녀를 위해 한 선택은 그의 딸들의 학업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가련한 자를 환대하는 경험은 당사자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딸들에게도 분명 가치있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무엇이 옳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반면, 악은 고민하는 법이 없다. 오늘날 "좋아, 빠르게 가!"의 삶을 보라. 확신의 실현을 위해 권력이 필요하고 점성술이 필요하고 신이 필요하다. 희생이 필요하다.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폭력이 따라다닌다는 점에서 그 같은 삶의 세계에는 악이 가득하다.
윤리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조건 없는 환대의 경험이다. 미시스 윌슨이 어린 펄롱의 어머니를 품어 주었기에 펄롱도 소녀의 얼굴을 외면할 수 없었다. 윌슨이 베푼 ‘사소한’ 친절과 환대의 기억이 펄롱의 양심이 된 것이다. 세계라는 그물망에서 사람은 저마다의 책임으로 얽혀 있다.
하이데거를 빌려 밀하자면 세계 속에서 인간은 그저 주어진대로, 내던져진 (피투) 삶을 살 수도 있고, 직접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투사 (기투) 하면서 미래를 열어밝힐 수도 있다. 이 책은 ‘가능존재’로서의 인간 펄롱을 조명한다. 번민과 갈등이 있었지만 결말에 이르러 그는 안온한 일상 대신 스스로의 삶을 '기투'하는 선택을 내린다.
비록 독자들은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지 끝내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건 그가 기획한 삶이란 세상에 따뜻한 것이었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고통스런 밤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펄롱은 선한 선택을 했다. 책에서 그는 소녀를 데리고 나오며 변변찮은 삶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충만한 행복을 느낀다.
펄롱이 그렇듯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세상에 대해 열어 밝혀져 있다는 점에서 ‘가능존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하나의 존재론적 ‘사건’을, 존재의 부름을 경험한다면 좋겠다.
아일랜드 배우 킬리언 머피가 제작하고 주연한 동명의 영화가 최근 개봉했다.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직접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는데, 그의 연기와 영화의 연출 모두 책 만큼이나 훌륭했다. 기대만큼 흥행은 못한듯 하지만 나로서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영화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