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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매니아 Jan 20. 2023

어쩌다 땡땡이

번아웃에서 벗어나기

    길고 길었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드디어 학교에 가게 되었다. 거의 5주 만의 일이다. 파티시에 공부를 시작한 뒤 채 3개월도 되지 않아 맞이했던 1년 전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바빠도 바쁜가 보다 하고 지나갔다면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후 맞이한 두 번째 크리스마스는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이다'라는 말처럼, 얼마나 바쁠지 그 사정을 뻔히 알아서 더 힘들게 보낸 것 같다. 크리스마스 대목에 부쉬드 노엘 감옥에 갇혀있다 곧바로 이어진 1월 갈레트의 지옥에서 허덕이다 드디어 학교에 모인 우리들. 학생들은 많이 지치고 힘들어 보였던 반면 2주간의 학교 방학 동안 알차게 휴식을 보낸 선생님들은 에너지가 넘쳤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시험이 5개월도 남지 않았음을 지적한 반면, 지난 5주 동안 시험 준비는 커녕 일하고 잠자기도 바빴던 우리들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좌절은커녕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이런 걸 번아웃(Burn out)이라고 하는 걸까? 시간은 촉박하고 공부할 학습양은 너무도 많아 아무 엄두도 나지 않는 상황. 이럴 바에는 그냥 다 포기하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오랜만에 들어간 불어수업에서는 시에 대해 배우는 시간을 가졌는데, 내 불어 실력이 작년보다 더 퇴행한 느낌마저 들어 착잡했다. 


    5주라는 시간이 흐른 만큼 변화도 있었다. 그동안 생일을 맞이해 몇몇 학생들이 성인이 된 것이다. 경력이 쌓이고 만 18세 성인이 되어 월급도 올라 오토바이를 사거나 부모님 댁에서 독립해 자취할 아파트를 알아보는 학생들도 생겼다. 어리게만 보였던 동기들이 점점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낡은 어른인 나는 그들의 설레는 고민들이 부럽고 또 예쁘게만 보였다. 이번 주는 실은 나의 과배란 기간이기도 했다. 이른 아침부터 검사를 하러 병원에 매일같이 왔다 갔다 하느라 피곤까지 쌓여 나의 학습 의욕은 바닥이었다.


    그런데 웬걸, 목요일 아침 가장 어려운 수업인 Technologie 수업 4시간이 갑자기 취소되었다. 학교에 남아 혼자 공부를 해야 하나 싶었는데, 학교 근처 기숙사에 사는 마리가 기숙사에 초대해 주었다. 공식적으로 허용된 땡땡이에 신나게 외출 신청서에 서명을 하고 학교 앞을 나섰다. 학교가 있는 Muret는 사실할 거리가 참 많지 않은 작은 주거용 도시이다. 괜히 한 번 학교 주변 예쁜 집들도 구경하고 장난도 치고, 기숙사 방에 모여 셀카도 찍고, 어쩌다 보니 우리 반 학생 전부가 맥도널드에 모여 점심도 먹었다.                

친구 자취집에 놀러 가는 기분이란, 그것도 학교 수업시간에 놀러 가니 더 신난 우리들. 

    난자 채취를 하루 앞둔 터라 걸을 때마다 배가 울려 힘들었지만 부지런히 동네를 걷고 또 걸었다. 오전 중에 학교도 빵집 주방도 아닌 바깥을 같은 반 친구들과 이렇게 걸어 다니는 건 너무나 달콤하니까. 교사 입장일 때는 시험을 앞두고 한 시간이라도 수업을 못하게 되면 진도 나가고 복습시켜 줄 생각에 마음이 급했는데, 막상 다시 학생이 되고 보니 정작 공부를 할 사람은 나인데도 수업을 빠지니 즐겁기만 한 아이러니.


    참, 그러고 보니 지난해 10월부터 급격히 줄어든 학생 수로 제빵반과 합쳐서 일반교과 수업을 듣게 되었다. 남학생들만 있는 제빵반 학생들 중 유일한 성인 아부바카와 칼리. 둘 다 기니에서 온 유학생들이지만 불어가 모국어라 나만큼 수업을 힘들어하진 않지만, 셋다 약한 역사 지리 수업에서는 셋이서 멀뚱멀뚱하다 눈을 마주쳐서 친해지게 되었다. 하교할 때마다 같은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학교 내에서 인기쟁이들이라 지나가는 학생들마다 인사하는 통에 나도 제법 아는 얼굴들이 많이 생겼다.  

타지에서 공부하며 일하는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는 든든한 친구들.

    그리고 금요일. 난자 채취를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사연을 아는 동갑내기 동료 필립이 실습 중에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줬다. 밀가루로 그려낸 하트. 제빵사답다. 고마운 마음에 나도 하트 전송. 

    요 며칠 가슴 졸였던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소중한 배아들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기다림. 일상. 내 일이 우선이냐, 아이가 우선이냐 따지고 잴 수밖에 없는 무수한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일도 아이도 둘 다 내 삶이라 싸우고 조율하며 동시에 진행할 수밖에 없다. 엄마가 되는 길은 참 어렵다. 그래도 같은 길을 함께 걷는 동료들, 멀리 한국에서 응원해 주는 가족들, 사랑하는 친구들, 그리고 내 짝꿍이 있어 외롭지만은 않다. 


    일, 공부, 시험관을 함께하며 찾아온 번아웃도 잘 이겨내 보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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