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ning, 2018
알면 알수록 보인다고. <버닝>의 영화 자체에 대한 흡입력은 매력 있다고 느꼈으나, 이야기 개연성과 전개 방식은 좀처럼 공감을 할 수 없었다. <버닝>은 복선을 이해하고 그 복선이 과연 영화에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느냐가 중요하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복선은 '해미(전종서 역)'의 '팬터마임'이다. 귤이 없지만 귤이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말은 곧 영화에서 나타나게 된다. 해미가 보일러에서 주웠다고 하는 고양이(보일이), 어렸을 적 우물과 관련된 이야기, 해미의 자취방에서 해미가 살았던 흔적,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 취미라고 말하는 '벤(스티븐 연)'. 분명 존재하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지만 이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들려온다.
보일이의 존재, 우물과 관련된 사건은 해미가 종수에게, 해미의 소식과 해미의 생각은 '벤(스티븐 연 역)'을 통해서 종수에게, 해미가 자취방에서 살았던 흔적은 주인이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운 소식은 벤이 종수에게, 그 무엇 하나 확실하게 확인된 바 없지만, 이야기를 통해서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팬터마임'이다. <버닝>은 영화 자체를 팬터마임의 도구로 만들어버렸다.
관객들은 종수와 마찬가지로 해미의 흔적을 찾고, 그의 이야기를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실재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고 오로지 들은 것이기 때문에 확신을 하지 못한다. 영화 내내 해미와 벤은 확실치 않은 정보들을 흘리며 그것을 종수가 확인하게끔 한다. 결말에 종수가 벤을 칼로 찌르고 불로 태워 증거를 없애는 것은 거짓과 허황에 대한 깨달음이다. 결국 <버닝> 이야기하는 것과 실재하는 것 간의 이 간극을, 매개체를 없애고 메움으로써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어떤 평론가가 말했듯이, 청춘의 삶과 그에 대한 고민이라는 주제는 매우 부가적인 것이다. <버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 실재하는 것 간의 간극에 대한 고뇌다. 해미의 팬터마임은 그것을 암시했고, 영화를 이루는 하나의 줄기가 되었다. 2018년의 영화라고 보기에는 정치적 올바름에 위배되고 성차별적인 요소가 많았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이 철학의 무게는 결코 시대에 뒤쳐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