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고, 본 것들의 기록
오랜만에 서점에 갔다. 점심시간의 서점은 우리 도서관만큼 사람들이 꽤 많았다. 신간 서적 매대에서 이런저런 책을 펼치며, 책을 고르는데 눈에 띄는 책 한 권이 있었다. 슬라보예 지젝이 쓴 <팬데믹 패닉>. 책은 그리 두껍지 않았으나, 표지가 무척 강렬하다. 반투명 커버를 벗겨보면 지젝의 얼굴이 있고 하단에 팬데믹이라고 쓰여있는데, 표지를 덮으면 저자의 얼굴에 방독면이 씌워졌고, 하단에는 패닉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팬데믹 패닉, 현재 상황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난 2월 26일부터 코로나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는 시기가 되었다. 시중에 코로나 19와 관련된 책이 많이 출간되었지만, 실천하는 이론가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사상가인 지젝이 설명한 <팬데믹 패닉>을 통해 정치적 성찰, 사회의 변화에 대한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이해해 보고 싶었다. 지젝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현대 철학자 중의 하나로 꼽히는데, 그는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고 있고, 재택근무와 같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으며 사람들과 격리된 생활을 하고 있다. 대면 회의, 예배 등이 비대면으로 전환되고, 공공도서관도 작년에 상당 기간 휴관하는 등 초유의 상황을 맞아 대응하느라 전전긍긍했던 경험이 있다. 1년을 지나고 보니 생물학적 공포가 경제적 공포로 이어지고, 질병과 싸우는 한편, 기존의 시스템과의 싸움이라는 이 책의 주장이 공감이 간다. 지젝은 "이 감염병을 하나의 재수 없는 사건으로 여겨서, 우리의 건강관리 채계를 약간만 조정한 채, 그 결과들을 삭제하고 예전처럼 매끄러운 일 처리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과학자들이 수년에 걸쳐 경고했음에도 우리를 아무 대비 없이 파국에 빠지게 만든 우리 시스템은 뭐가 잘못된 것일까?"라고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지젝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코로나 19로 드러난 자본주의의 허점이다. 더 이상 시장경제와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감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기에, 우리는 시장 메커니즘이 혼란과 기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대다수에게 '공산주의'적으로 보이는 조치들이 전 지구적으로 고려될 것이다. 생산과 분배의 조정이 시장의 조절력 바깥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하면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재난 기본소득을 지급한 것이 자본주의 허점의 예라고 하였다.
두 번째로는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세계는 야만스럽게 변할 것이라는 것이다. 식료품과 생활용품이 동난 유럽의 슈퍼마켓이나 영국의 정부 관료가 주장한 인류의 60 집단면역 등과 같이 위기 속에서 국가가 개인을 방관하거나, 개인이 국가가 본인을 책임질 수 있다는 신뢰가 없어진다면 살아남기 위해 대중적 무질서를 동반한 야만이 발생할 것이고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노인, 장애인,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젝은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전 지구적인 연대와 협력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한다. 지젝은 변화의 방향을 "새로운 공산주의"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말은 장미빗 미래를 밝혀줄 비전이 아니라 재난 자본주의의 해독제로 쓰일 '재난 공산주의'의 전망에 가깝다. 국가가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떠맡아 마스크, 진단키트, 산소호흡기 같이 긴급하게 필요한 물품들의 생산을 조정하고, 호텔과 여행지들을 고립시키며 실직한 모든 사람의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등의 조치를 수행해야 함은 물론 이 모든 일을 시장 메커니즘을 버려가며 해야 한다고 한다.
재난 공산주의는 중국이 우한을 봉쇄한 것, 대만이 중국인의 입국을 막고 마스크 실명제를 도입한 것, 대한민국의 k-방역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코로나 19를 위한 음압병상 동원, 자가 격리, 확진자 동선 공개, 감염 공간 폐쇄, 마스크 5부제,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을 강제로 실행하는 것이나 위축된 경기를 살리기 위한 재난지원금 지급, 자영업자 등을 위한 재정 지원 등 국가의 권한이 폭넓게 행사되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시계 많은 국가가 비슷한 양상이며, 시장 메커니즘으로는 상황 대처가 어렵기 때문에 '공산주의적'으로 보이는 조치들이 전 지구적으로 고려되고 있다고 지젝은 보고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옛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을 이해 실행되는 개념이며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공면역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젝은 공산주의라는 명칭에 대한 비난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질서를 뭐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2002년 11월 중국에서 시작된 사스의 경우 29개국 8,096명의 환자가 발생하였으나 환자의 91.7%가 중국과 홍콩, 대만에서 나왔으며 메르스 역시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 인근에서 포착되었는데 2015년부터 본격 확산되어 총 26개국에서 1,511명의 환자가 발생하였다. 이 중 94.7%가 사우디, 한국, 아랍에미리트연합 3개국에 집중되었는데 코로나 19는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세계 간의 공조가 절실하다. "모두 다른 배를 타고 왔지만, 우리는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마틴 루터 킹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 민족 먼저' 식의 민족주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코스모폴리탄의 자세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코로나 19 이후 인류가 맞게 될 상시적인 바이러스 사회에서 국가의 공적 기능이 커지고, 우리의 생명과 생존이 함께 추구될 수 있는 평등한 공동체를 그리는 일에 많은 논의를 하였다. 지젝은 방역과 경제가 공존하는 이 사회를 거침없이 공산주의라고 부르고, 이를 현재의 사회주의 체제나 자본주의 시스템과 구분하였다. 이 새로운 공산주의는 한 국가의 정치 시스템이 아니라 전 지구적 협력으로 탄생할 초국가적 지구 정치 모델이라는 것이다. 지젝 말대로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이러한 정치적 혁명의 계기를 마련해줄지 아니면 차별과 배제가 교묘하게 강화된 새로운 야만의 시대로 회귀할지는 정말로 우리 손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