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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rian Pia Aug 08. 2021

작은 인간관계들의 고리 속에서
행복하기 위해

읽고, 쓰고, 본 것들의 기록

<개인주의자 선언> 리뷰


 ‘블라인드’라는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익명성에 기대어 개인적인 취향부터 재테크, 직장생활 등의 애로사항을 털어놓는 일종의 대나무 숲 같은 가상공간이다. 거기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직장 내 세대 갈등이나 조직 문화에 대한 불만 글을 읽으며 나를 돌아보고, 조직 관리에 참고하고 있다. 특히 90년대 생 젊은이가 조직에서 함께 일하게 되면서 그들이 쓰는 단어나 일상생활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어 종종 찾곤 한다. 어느 날, 전날의 조촐한 술자리에서 느낀 동료들의 집단주의와 본인의 개인주의 관점의 갈등으로 괴로움을 토로하는 내용이 올라왔고, 관계가 좋았던 상사와의 가치관 상충으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그마저 적응해야 하는 현실이라는 글도 읽었다. 이 외에도 집단주의 문화에서 개인주의 성향의 젊은 세대들의 고충 토로가 생각보다 많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020년 직장인 1만 3천 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세대갈등과 기업문화에 관련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정시 퇴근하는 젊은 세대에 대해 관리자들은 일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하고, 개인주의 넘어 이기적 행동으로 보았고, 젊은 세대는 야근을 당연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회식의 경우도 관리자들은 소통을 위해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젊은 세대들은 두통거리 의전의 연속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할 수 있다’는 항목에서 4.50대는 66.7%가 동의한 반면 2.30대는 35.2%에 불과하였다. 젊은 층은 관리자들을‘꼰대’로 취급하고, 관리자들은 젊은 사원을‘요즘 애들’로 보며 서로 이해하지 않는 조직문화가 직장 내 갈등의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혈연, 지연, 학연, 직장 등을 통한 관계 형성을 생존전략이자 미덕으로 삼고 집단에서 사고하는 것이 마음 편하고, 나를 희생해서 공동의 성과를 이루어 내는 것이 당연한 시대를 지내왔다. 집단주의이자 공동체를 중시하는 대한민국에서‘나’ 하나를 챙기는 것이 힘든 세상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때로는 맹목적인 집단주의에 얽매인 삶에 피로감을 호소하고, ‘혼밥’, ‘혼술’그리고 ‘나 혼자 산다’를 추구하게 되었다.

 집단주의와 함께 사회 구성원이 추구하는 가치가 획일화되고, 서열화하는 수직적 가치관도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학벌, 직장, 직위, 사는 동네, 애들 성적 등 외관적 지표로 줄 세우기를 하는 사회에서 논리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없다. 꼰대가 넘치는 세상, 남에게 과도하게 관심을 가지는 이 세상에서 개인주의자가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일까.  비교, 물질주의, 뒷담화, 패거리 문화, 공격적 열등감, 무조건적 이념주의, 흑백논리, 진영논리만이 확연한 정치, 선별되고 다듬어진 일부를 보고 전체라고 인식하는 착각...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이런 사회를 좀 더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우선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나를 돌아보고, 시민으로서 서로를 바라보고 연대할 필요가 있다. 

 집단주의에 반대되는 단어, 개인주의. 우리는 사실 집단주의 문화에 익숙한 나머지 개인이라는 말은 다소 낯설고 긍정적이지 않다.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사회의 이익,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은 희생하는 문화가 뿌리 박혀 있다. 또한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착각하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은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각자의 행복을 찾아 살자는 한 개인주의자의 외침으로, 집단주의에서 어떻게 개인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왔는지,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선언이란 자기의 주장이나 뜻을 널리 알리는 것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집단주의가 견고하면 개인주의자임을 선언까지 해야 할까 싶다. 

 가정, 학교, 직장이 기본적으로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고, 상명하복이나 집단이 우선시되는 분위기에서‘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와 같은 존재처럼 여겨진다.  

 “나는 소박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일상 속의 작은 행복을 채워가는, 그러면서도 마음이 가는 일에는 주저 없이 자기 힘닿은 범위에서 참여하는 이들이 이끄는 곳을 가고 싶다.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비극이 가득했지만, 그 어떤 불행한 시대에서도 인간이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82쪽) 

 그러나 아무리 개인주의를 선언한다고 해도 세상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밀레니얼 세대들도 혼자 있고 싶지만 외로운 건 싫다고 한다. 집단주의에 회의를 느낀다고 해서 공동체적 욕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 타인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다른 이의 개인주의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범위를 나, 가족, 계급, 성, 인종, 국적의 범위를 넘어 계속 넓혀온 역사가 바로 인간이 폭력적인 본성과 싸워온 과정이다.”(315쪽)

 그래서 문유석 판사는 합리적 개인주의를 제안한다.‘합리적’이라는 말은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한 것을 의미한다. 합당하다는 것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이 도리에 맞고, 무리가 없는 모양새이다. 그러려면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개인주의는 나와 너를 똑같이 존엄하고 평등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주체적으로 정립하고 각성된 합리적 개인이야말로 공동체와 연결되어,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도리에 맞게 행위할 수 있을 것이다. 합리적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공동체 안에서 관계의 속성이 불행의 원천으로 작용하지 않으려면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함부로 간섭하지 않고 배려하는 성숙한 개인주의 문화의 사회로 이행해야 한다.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현실에 만족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늘어나는 현상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개인주의자’는 더 확산될 것이다. 앞으로 많은 이들이 집단의 강요 없이, 스스로 선택한 취향이 맞는 작은 인간관계들의 고리 속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합리적 개인주의자로 선언할 것이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되, 내 주변의 친밀한 세계와 사회라는 커다란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애쓰는 그런 개인주의자들 말이다.


* 독서IN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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