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장의 업무 일기
설 연휴가 지나고,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새해가 되었다. 업무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공공도서관의 1년은 단체장과 의회 나으리들께 새해 업무를 보고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사실 신년 업무는 전년도 7월부터 어느 정도 방향을 정하고, 밑그림을 그려놓는다. 그때부터 다음 해 예산편성 작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12월 말까지 길고도 험한 예산 투쟁 끝에 예산이 확정되면, 새해에는 예산 범위에 맞는 사업을 재설계해야 한다. 주요 사업에 대한 업무보고를 마치면 직원별로 또는 분야별로 연간 계획을 구체화하여야 하는데, 이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초기에 사업의 디자인을 잘못할 경우, 1년 내내 담당자와 관련자들이 계속 수정 보완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본래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담당자 혼자만의 고민보다 함께 토론하고, 다듬고 의견을 보태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설 연휴 전후로 신년 사업계획안을 분야별로 나누어 발표하고, 토론하는 회의를 하였다. 담당자가 작성한 초안을 가지고 브리핑을 하면, 함께 개선사항과 보완사항을 이야기하고 추진 시기나 방법에 대한 조언을 서로 아끼지 않는 회의이다. 담당자들도 스스로 고민이 많았던 만큼 자기 사업을 논리적으로 발표하고, 전년도 평가와 신년도 추진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조언에 대해 적절하게 답변하거나 수용한다. 얼마나 대견한 모습인지, 순간 뭉클해진다.
공무원사회는 칸막이 행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업무도 단위별로 잘라 개인별로 분장하고, 흥하든 망하든 담당 직원이 책임을 지는 구조이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이 없다. 누가 관심 갖는 것도 싫기도 하다. 다행히 선임이나 상급자를 잘 만나면 담당자가 덜 힘들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직원들은 본인이 삽질을 하는지, 제대로 하는지 의심하면서 고민을 한다. 주어진 업무환경이 새로운 도전을 기피하게 만들고, 전임자가 하던 대로 또는 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소극적인 업무 행태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처음 이 도서관에 왔을 때 직원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은 이야기가 "나 혼자 어디까지 책임지라는 말인가"였다.
조금이라도 혁신적인 도서관 서비스를 하려면 내부 구성원부터 변해야 한다. 물론 내부로부터의 혁신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그래도 우리는 변화의 불씨 역할을 한 직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난 몇 년간 조직의 변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할 수 있었다. 직원들과 학습동아리를 하고, 워크숍을 하고, 함께 강의를 듣고, 회의하고, 면담하고, 같이 밥 먹고... 그 결과가 지난주, 그리고 어제 회의의 모습이다. 본인의 업무를 평가하고,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추진체계를 만들고, 성과관리 요소를 찾아내고 또 그것을 관장과 동료 앞에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감동하였다. 문서작성도 너무 잘했고, 진지하게 설명하고 성숙하게 의견을 나누는 모습도 너무나 멋졌다.
우리 직원들은 조금씩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여린 초록잎들이 이제 튼튼하고 무성한 잎으로 자라나고 있다. 본인들의 직업적 사명감을 알게 되고, 무엇을 할 것인지 함께 나누면서 공공도서관의 변화를 견인할 것이다. 똑똑하고 젊고 열정적인 사서들에게 관성에 젖은 늙은이들이 서서히 자리를 비켜주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기쁘게 그날을 맞을 것이다.
연휴 뒤의 바쁜 한주간이 저물어간다. 비교적 한가했던 일상도 무너지고, 잠드는 시간도 점점 늦어지지만 그래도 덜 피곤하다. 기분이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