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여행
파주 권역 DMZ를 상징하는 땅굴이 제3땅굴이라면, 철원 권역 DMZ를 상징하는 땅굴은 제2땅굴이다. 그러니 당연히 철원 DMZ 평화여행의 일정 안에도 제2땅굴 관람이 들어 있다. 제3땅굴이 약 1.6km 길이인데 반해 제2땅굴은 약 3.5km 길이로 두 배 가량 더 길고, 출구가 세 군데로 갈라져 있으며 내부에 대규모 병력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길이가 길어서, 유사 시 무장 병력 16,000여 명이 1시간 동안 0.8m의 간격을 유지하며 2열 혹은 3열 대형으로 침투가 가능한 수준이라고 한다. 1973년 11월 20일 새벽 4시, 청성부대 상병 이기태와 일병 김효섭이 경계 근무 중 지하로부터 폭음을 청취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굴착작업을 이어간 끝에 1975년 3월 24일 땅굴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안에는 각종 팻말과 사람 모형을 가져다 놓아서 약간 으스스하며, 평화 통일을 기원하는 모금 항아리가 존재한다.
북한은 자신들이 땅굴을 판 게 아니라며 부인하고 있으나, 이를 반박할 증거들이 너무 명확한 게 사실이다. 폭발 공법을 이용하는 북한은 다이너마이트를 장전하여 굴착을 하였으므로, 장전 구멍의 흔적은 북에서 남을 향해 뚜렷이 남았으며 굴 벽면에 폭발로 그을린 자국들도 남았다. 남한은 굴착 시 대형 굴착 기계를 이용하므로 벽면에 다이너마이트 장전 구멍이나 그을린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아울러 갱도 공사 후 물을 빼내는 배수로의 방향은 반대로 남에서 북을 향해 있고, 이는 공사를 진행한 주체가 북측에 있다는 뜻이 된다. 땅굴은 만드는 데 많은 자원과 인력이 투입되지만, 일단 발견되는 순간 출구를 막아버리면 쓸모가 없어지므로 비밀 무기로서의 가치가 한순간에 날아간다. 아울러 땅굴을 탐지하는 지질학 기술 및 땅굴을 파괴하는 무기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어, 북한의 굴착 움직임이 근래에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제2땅굴 관람이 끝나면 여행객들은 인솔 차량을 따라 조금 떨어져 있는 평화전망대로 간다. 평화전망대 1층은 전시관, 2층은 전망대, 3층은 군부대 휴게시설로 사용된다는 게 다소 특이하며, 모노레일 이용료가 저렴한데다 이걸 타고 2층으로 올라가는 게 나름의 재미가 있어 추천한다. 날씨가 좋으면 2층 전망대의 초정밀 망원경을 통해 북한의 선전마을과 초소, 평강고원을 바라볼 수 있다. 고원의 평균 해발고도는 320m로, 서울의 남산이 265m인 걸 염두에 두면 꽤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한국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피의 능선과 김일성이 직접 올라 전투를 지휘했다는 김일성고지도 전망대에서 보인다. 김일성고지는 남한군과 북한군 진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있는데, 38선 이북에 있어 전쟁 전 북한의 땅이었던 철원을 대부분 남한에 빼앗기자 김일성은 눈물까지 흘려가며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철원은 강원도에서 가장 크고 현무암이 풍화된 비옥한 평야를 끼고 있어 일제강점기부터 이미 곡창 지대로 분류되었기에 뼈아픈 손실이었을 것이다. 임진강 지류인 역곡천 상류를 막아 만든 봉래호저수지가 본래 철원에 농업용수를 대었지만, 전쟁 후 북한은 봉래호의 물길을 황해남도 재령으로 돌려버려 할 수 없이 남한에선 토교지, 동송지, 산명호지 등을 추가로 건설해야만 했다.
평화전망대 다음으로 관람객이 들르게 되는 장소는 월정리역이다. 월정리역은 경원선의 간이역으로서, 본디 신탄리역을 지나면 바로 닿게 되는 역이었다. 전쟁 이후 불타버린 채로 남았던 역 건물을 1988년 이전 복원하였으며, 건물 내부에는 탈선한 열차의 잔해와 4001호 디젤 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개성관광을 위해 남북한이 함께 연결한 경의선과 달리, 경원선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월정리역을 기차역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어찌됐건 위치적으로는 남한 측 최북단 경원선 역이다. 월정리(月井里)는 달우물 마을이란 뜻이다. 먼 옛날 이 동네에 병든 아버지를 돌보는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 병을 낫게 해달라고 달에게 빌다가 잠든 처녀의 꿈 속에 백발의 도사가 나타났다고 한다. 도사는 ‘집 옆 바위 위에 물이 고여 있다. 달이 지기 전에 네 손으로 천 모금을 길어 아버지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고 일러주었으며, 잠에서 깬 처녀는 허둥지둥 바위에서 물을 길어 아버지의 입에 넣었다. 달이 지기 전에 천 모금째 물을 넣자 아버지의 병은 나았으나 처녀는 힘이 다해 죽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물이 고였던 자리를 달의 우물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은 월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한이 많은 나라여서 그런지 유달리 우리나라엔 이처럼 비극적인 민담이 많은데, 민담 뿐 아니라 이 땅에는 비극적인 역사도 깃들어 있다. 월정리역 건너편에는 태봉국의 철원성, 통칭 ‘궁예도성’의 외성이 자리잡고 있다. 경원선은 궁예도성 외성을 관통하여 지나가는데, 한반도가 하나의 지역이었던 일제강점기엔 이곳에서 다수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우선 남대문 터에서는 귀부(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발견되었다. 아울러 당시 발간된 ‘조선보물고적도보’에 태봉국 왕궁성 부근에 팔각 오층석등이 있다고 나와 있으며, 석등은 국보 118호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한국 전쟁 이후 지금까지 소재 불명 상태이다. 경원선이 남북으로 궁예도성을 가르고 있다면 군사분계선은 동서로 가르고 있다. 궁예도성은 기막히게도 정확히 DMZ 안에,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들어가 있고 그 가운데 군사분계선이 지나가므로 발굴 조사가 불가능하다.
고귀한 핏줄을 타고났으나 버려졌고,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일국의 왕까지 되었던 궁예는,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백성들에게 맞아죽었다. 그의 일생도 한스럽지만 동서남북으로 잘려버린 그의 도성도 한스럽다. 궁예도성의 외성은 길이가 12.5km, 내성은 7.7km에 이르는데 이는 백제의 풍납토성(3.5km), 신라의 월성(1.8km), 고구려의 국내성(2.7km)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이며 오히려 조선의 한양도성(17~18km)에 필적한다. 궁예의 나라 태봉은 <주역>에 나오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문장에서 태(泰)와 봉토의 봉(封)을 합하여 나라 이름이 정해졌다고 한다. 궁예는 영원한 평화와 평등이 깃든 나라를 건설하고 싶었던 듯하다. 실제로는 궁핍한 국가 재정 상황을 외면한 채로 도성을 사치스럽게 짓고, 아내와 아들들을 살해하는 등 폭정을 저질렀지만 말이다.
궁예는 원대한 꿈을 품었으나 그 꿈은 본인만의 것이었을 따름이었으므로 그와 함께 했던 이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궁예가 세상에 나왔다 스러진 지 약 천 년 후에, 그와 아주 닮은꼴인 이가 이 땅에 다시 나타났다. 남한에 남은 김일성의 자취를 좇아, 이번에는 노동당사로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