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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ux Apr 26. 2024

마음의 평안을 찾아

깨달음의 세계로

 서울에서 자동차로 쉽게 도착할 수 있는 파주나 철원 권역 DMZ와 달리, 고성의 DMZ는 상대적으로 제법 많이 멀다. 서울이 국토의 서쪽에 치우친 반면 고성은 국토의 북동쪽 끝에 위치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통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외국인 대상 투어에서 고성 권역 DMZ는 열외되기 일쑤다. 하지만 고성은 짙푸른 동해를 끼고 있어 풍광이 아름답고, 내국인들이 휴양 목적으로 자주 찾는 속초나 양양과 가까워 그 나름의 매력이 있으므로 시간 여유가 있는 여행자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장소 중 하나다. 직선 거리로만 따진다면, 철원에서부터 고성까지의 거리가 서울에서부터 고성까지의 거리보다 당연히 절반 가까이 짧다. 그러나 막상 철원에서 고성을 가려면 변변한 고속도로도 없이 꼬불꼬불한 국도로만 가야 해서, 실제로 걸리는 시간은 서울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걸린다. 대신에 철원에서 고성을 가면 또 다른 DMZ 권역, 즉 화천과 양구를 같이 둘러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이 두 권역은 내륙 중의 내륙이므로 어지간한 의지와 목표를 갖지 않는 이상 방문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가급적 다양한 지역을 둘러볼 계획인 우리는 시간이 더 들더라도 철원에서부터 고성 권역 DMZ 여행을 시작한다. 철원의 노동당사와 아주 가까우면서도 은근히 사람들의 시선에서 떨어져 있는 명소가 있는데, 그곳은 다름아닌 도피안사다. DMZ 권역을 다니면서 슬프고 비참한 역사가 서린 장소만을 보았다면 여기서 쉬어가도 좋다. 사찰의 이름이기도 한 ‘도피안(到彼岸)’이란 단어에는, 서로의 득실에 따라 아귀다툼하는 사바 세계의 괴로움을 떠나 철학적으로 안정된 극락 세계로 가고 싶은 이들의 간절함이 엿보인다.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여 평안하고픈 욕망은, 어쩌면 모든 인간의 것일지도 모르기에. 


 도피안사라는 네 글자가 세 글자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사찰 이름과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것처럼, 도피안사의 불상도 여타 사찰의 불상과 완전히 판이하다. 도피안사 대적광전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상은 쇠로 주조된 철불이다. 유독 우리나라에선 8~9세기,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에 철불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그 까닭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구리보다 쇠가 훨씬 구하기 쉬운 재료였으므로, 철불을 제작하는 주체였던 지방의 호족들이 쇠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뿐이다. 철원 도피안사를 포함하여 장흥 보림사, 광주 증심사, 남원 실상사, 동해 삼화사, 예천 한천사, 청양 장곡사 등에 철불이 있는데, 불상이 앉은 대좌까지 모두 쇠로 만든 경우는 도피안사 철불이 유일하다고 한다. 


 쇠는 구리에 비해 다루기도 어렵고, 작품을 섬세하게 만들기 힘든데다 불상처럼 크기가 큰 작품은 틀에 찍어낸 부품을 이은 흔적이 남아 어지간해선 불상의 재료로 잘 쓰이지 않는다. 당시엔 용광로가 없어 쇳덩이를 여러 개의 도가니에 넣어 1,200도 이상 온도로 녹인 뒤 동시다발적으로 부어 불상을 만들어야 했다. 더구나 중간에 작업을 멈췄다가 다시 쇳물을 부으면 불상이 깨지기 십상이었다고 한다. 이런 제약 탓에 철불은 중국에서도 12세기 송나라 시기에 주로 유행했고, 일본에서는 이보다도 더 늦은 13세기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등장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철불들이 8~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그만큼 쇠를 다루는 조상들의 기술 수준이 인근 국가들보다 무척 앞서 있었다는 걸 드러낸다. 또한 도피안사 철불의 경우 불상의 등에 제작 연대와 장소, 참여한 이들의 숫자 등의 정보가 정확하게 나타나 있는 게 특징이며, 이를 통해 통일신라 후기인 서기 865년(신라 경문왕 5년) 정월에 용악 견청의 지휘 아래 1,500명의 향도 조직 거사들이 불상 만들기에 참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작은 절이지만 도피안사에는 재미난 이야기들이 몇 개 전해 내려온다.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의 지휘 아래 승려들이 철불을 철원 수정산의 안양사에 옮기고 있었다. 해는 벌써 서산에 걸렸는데 철불을 등에 진 암소가 지쳐, 도선국사 일행은 철원읍 화지리의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기로 하였다. 그런데 다시 출발하려니 그새 철불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고, 도선국사는 낙담하여 가던 걸음을 마저 갔는데 놀랍게도 지금의 도피안사 터에 철불이 앉아 있더라는 거였다. 이에 도선국사는 거기다 사찰을 창건하였고, 산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듯 유약한 형상이라 석탑과 철불로 산세의 약점을 보완하여 국가의 안녕을 빌고 외세의 침략을 대비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한국 전쟁 중 참혹한 피해를 입은 철원에 있었는데도 철불만은 살아남았다. 폭격으로 사찰이 파괴되어 폐허뿐이었던 1959년, 이명재 육군 15사단장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내가 지금 땅 속에 묻혀 있어서 너무 답답합니다. 나 좀 꺼내 주시오.”라 했다고 한다. 이튿날 장군이 장병들과 순찰을 나갔다가 갈증을 느껴 민가에 들렀는데, 집주인 얼굴이 꿈에서 본 부처와 너무나 흡사하여 집주인과 함께 인근에 있다는 절터를 찾았다. 그들은 극적으로 절터 바닥에서 반쯤 파묻힌 철불을 발견하였고, 도피안사가 재건된 후 그것을 봉안하게 된다. 현재 대적광전 안에는 이명재 장군과 당시 철불을 처음 발견했던 장교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도피안사를 지나 다시 고석정 국민관광지를 거쳐 화천으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김일성의 흔적이 남은 또 다른 국민관광지를 거쳐 넘어가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철원 남부와 포천 북부의 경계에 인접한 관개용 저수지가 있는데, 우리는 그 저수지를 흔히 산정호수라 부른다.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영북면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축조된 이 저수지는 ‘산 속의 우물’이란 뜻으로 산정호수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산 안에 있는 저수지라 하여 주민들은 ‘산안저수지’라고도 불렀다 한다. 마침 산정호수 주변을 망봉산, 망무봉, 특히 억새 군락지로 이름높은 명성산 등이 둘러싸고 있다보니 풍경이 퍽 아름다웠고, 소련 군정 치하에 놓였던 시절엔 북한의 통치자였던 김일성이 호숫가에 별장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산정호수는 남한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1977년에는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고, 주변에 온천과 리조트, 식당들이 즐비한 데다 호수 주변을 돌아보는 둘레길도 생겨 날씨가 맑은 주말엔 북새통이 따로 없다.


예쁘기는 참 예쁘다. 저수지라 하기 아까울 만큼. 출처: 오마이뉴스

 도대체 김일성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토록 DMZ 여행 안내에서 자주 거론되는 것일까. 화천으로 넘어가면서, 김일성에 관해 조금 더 깊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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