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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정 May 19. 2020

르네 마그리트, 대체 어떤 사람일까

"내 그림을 해석하지 말라" :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 관람기

르네 마그리트, <골콩드 Golconde>, 81x100cm, 캔버스 위 유채, 1953


각종 광고 등에 많이 등장하는 이 그림,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나 또한 이 그림과 중절모, 사과, 파이프 등의 이미지로만 르네 마그리트에 대해 들어보았고,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중절모를 쓰고 양복을 입은 똑같은 신사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한 명 한 명의 표정이 다르며 쏟아지는 것이 아닌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한 그림, 이런 그림을 그린 작가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번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은 마그리트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대체 마그리트는 누구이며, 왜 이런 그림을 그리는지, 그의 그림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전시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원화와 도슨트가 없고, 영상, 미디어아트 등으로 구성된 멀티미디어 체험형 전시이기에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온전히 느끼고 알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아쉬움이 남을 듯하다. 나는 마그리트와 그의 작품세계를 처음 접하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나름 흥미로웠지만, 작품의 수나 미디어 아트의 퀄리티, 마그리트에 대한 설명 등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았다.  


전시는 '입체 미래주의 > 초기 초현실주의 > 암흑기 > 파리에서 > 친화력 > 햇빛 아래 초현실주의 > 바슈 시대 > 마그리트의 헌신' 순서로 시대별 마그리트의 작품과 이야기를 소개한다. 대부분의 마그리트 작품이 그렇듯, 아무리 설명을 읽고, 그림을 보고 있어도 제목과 작품의 연관성과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읽기는 쉽지 않았다. 이에 약간의 작품 해설의 도움을 받아 내 마음대로 이해하고, 의미를 발견한 작품 위주로 감상과 느낌을 남겨보고자 한다.




르네 마그리트, <익숙한 사물들 The Familiar Objects>, 81x116cm, 캔버스에 유채, 1928


마그리트가 벨기에를 떠나 파리로 이사를 갔던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마그리트는 프랑스 초현실주의 그룹을 마주하고 꿈과 무의식적 창작 행위를 중요시 여긴 그들과 자신은 다르며, 무의식 또는 프로이트 이론으로 자신의 그림이 해석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나 역시 모든 초현실주의 작품은 비현실을 담아낸 것으로 인간의 무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익숙한 사물들'이라는 작품은 왜 르네 마그리트가 무의식적 창작행위, 꿈 등을 표현한 프랑스 초현실주의와 선을 그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작품이었다. 작품 속 모든 사람들의 눈 앞에 각각의 사물을 하나씩 배치하여 그 사물을 자세히 드러내고, 각자의 사람은 눈 앞의 사물만을 바라보도록 나타낸 모습이 마치 '이게 네가 알고 있는 익숙한 물건들이 맞니?' 질문을 던지는 기분이었는데, 그저 무의식 속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었다는 느낌보다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확한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익숙한 대상에 대해 나는 정말 잘 알고 있을까?




르네 마그리트, <연인들 The Lovers>, 54x73.4cm, 1928 (좌측 연인들1, 우측 연인들2)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인'이라는 이름 아래 한 곳을 바라보고, 격렬한 키스를 하고 있지만 회색 천으로 막혀 있는 모습에서 답답함과 어딘지 모를 애처로움, 불안함을 느꼈다. 이 그림을 두고 마그리트가 어린 시절 강물에 투신자살한 어머니의 시신이 잠옷으로 얼굴이 감싸진 채 건져지는 것을 목격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과 달리 마그리트는 이를 부정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작품이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는 연인 혹은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를 담은 모습,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이성을 잃어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모습, 이어질 수 없는 관계를 이어가고자 서로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는 연인의 욕심을 담은 모습. 무엇이 작가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 준 작품이었다. 문득 회색 천을 걷었을 때 그림 속 연인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르네 마그리트,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 100x81cm, 캔버스에 유채 (좌측 1933년, 우측 1935년)


제목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어서 한참을 고민했던 작품이다. 작품 속 캔버스에는 창가에서 보이는 풍경을 담고 있는데, 그 모습이 풍경과 너무 똑같아서 그림과 풍경의 경계가 모호하다. 설명에 따르면 캔버스에 담긴 현실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그리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캔버스 속 세계가 현실이라고 할 수 없는데 이러한 모호한 경계를 외부와 내부의 접점인 '창문'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대체 왜 작품의 제목은 '인간의 조건'인 걸까.


정답은 없겠지만 나름대로 생각해본 의미는 이러하다. 우리는 작품 속 그림을 바라볼 때, 캔버스 속 이미지와 창문 밖 이미지를 동시에 보게 된다. 하지만 캔버스 속 이미지는 창문 밖 실제 풍경의 일부만을 담고 있으며, 창문 밖 실제 풍경은 캔버스에 가려져 캔버스와 함께 봐야지만 가려진 부분까지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어쩌면 인간이란 혼자일 때는 그 어떤 것도 완전하게 알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작품 속 풍경과 캔버스 사이의 모호한 경계처럼 인간도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순간들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으며, 캔버스와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자신의 틀 안에서 세상을 보지만, 사실 자신과 세상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측의 검은 구체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는 추측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정말 어렵다..)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The Empire of Light>, 1949-1954, 영상으로 재해석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밤과 낮이 함께 나타나는 '빛의 제국'은 마그리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점 이상을 그린 연작이다. 어두운 밤 불이 켜진 집의 창문과 가로등의 불빛, 이와 대조되는 하늘은 뭉게구름이 떠 있는 환한 대낮,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풍경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작품을 처음 보고 든 기분은 '편안함'이었다. '두렵지 않은 밤과 소란스럽지 않은 낮'이라고 표현하면 조금 와 닿을까.


전시장에는 이 작품을 음악과 영상으로 재해석하여 관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둥글게 둘러싸인 스크린 안에서 마그리트가 표현한 빛의 제국을 보다 현실감 있게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는데, 개인적으로 본 전시에서 미디어 아트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영상 참고) 너무나도 대조적인 두 요소에서 조화롭고 편안함을 함께 느끼며 우리가 대조적이고, 정반대이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해 온 것들이 실은 경험해보지 못함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일 수 있겠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르네 마그리트, <레슬러의 무덤 The Tomb of the Wrestlers>, 1961/ <리스닝 룸 The Listening Room>,  1953


잘 알려진 마그리트 작품이자, 당최 작가의 의도를 알 수가 없는 작품, 마땅히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해설도 찾을 수 없었던 작품이다. 장미와 사과라는 개체도,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크기도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열정을 다한 레슬러를 형상화하여 추모하는 마음만큼이나 거대하게 붉은 장미를 가득 채워 표현한 것인지,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인간의 내면을 사과에 투영시키고자 한 것인지, 혹은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되지 않은 숨은 메시지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더 흥미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한 기사에 따르면 마그리트는 일생 동안 '신비'라는 단어를 강조했으며, 자신의 그림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자들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한다. 관객이 자기 그림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데 실패할 때 흡족해하며, 내 그림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하니, 작가의 의도대로 더 이상의 고민은 멈추어야겠다.




마그리트의 작품을 보며, 초현실주의 작품은 현실에서 벗어난 모습을 담은 형이상학적인 사조임에도 오히려 이를 통해 현실의 본질을 끝도 없이 생각해보게 하는 '사실의 극치'라는 한 칼럼니스트의 글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려고 했던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적인 도전이 현재에 던지고 있는 수수께끼는 참 신기하면서도 어렵다. 너무 어렵다. 작품 하나를 보며 수십 개의 질문을 하게 되었던 오늘처럼 익숙하고 당연한 일상에 의문을 던지며 살기 위해 애쓴다면 진짜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에게 있어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다.

영감은 무엇이 일어나는 것을 아는 순간이다.
보통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는지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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