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타티-<플레이타임>
무성영화시대 가장 위대한 이름 중 하나를 말하라면 당연히 찰리 채플린의 이름이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위대함은 단순히 영화적 완성도를 넘어 영화 안에서 목소리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를 탐구했다는 점에서 무성영화에 가장 중요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표현주의 감독들이 화면의 미술적 가능성을 통해 영화를 발전시켰다면 찰리 채플린은 그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면서 화면을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만들었다. 순수한 육체의 운동. 목소리 없는 운동. 찰리 채플린은 그 자신이 연기한 방랑자를 통해 스크린 위에서 존재했다. 이때 이 방랑자는 한 명의 주체로서가 아닌 그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운동을 창조한다. 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카메라는 그 균열의 운동을 따라간다. 의지 없는 운동. 존재가 사건이 되는 운동. 그러면서 이 방랑자는 부르주아의 세계에 자신만의 운동으로 균열을 내고 저항한다. 그것이 찰리 채플린이 소외된 관객에게 다가서는 방식이고 세계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 방법론은 분명 무성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유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채플린은 방랑자를 더 이상 연기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채플린은 상황을 만들어내는 추상적 캐릭터가 아닌 한 명의 주체를 연기하면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갔다. 그렇게 더 이상 과거의 채플린을 볼 수 없다고 생각될 때쯤 영화사는 자크 타티라는 이름을 만나게 되었다.
자크 타티의 영화를 보면서 찰리 채플린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영화들이 찰리 채플린의 영화처럼 인물의 운동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에서 서사와 플롯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대신 영화 속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그 운동의 흐름 자체를 따라간다. 그리고 이 운동은 찰리 채플린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순환에 균열을 내고 그 부조리를 고발하는 운동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인간이 부품이 되어가는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저항. <축제일>에서 미국 우편 시스템을 따라 하다가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프랑수아와 그를 구원하는 어머니. 부르주아들의 휴가지에서 인간적인 활력을 불어넣는 <윌로씨의 휴가>의 윌로. <나의 아저씨>에서 기계화된 집으로부터 조카를 해방시켜 주는 윌로. 자본을 위한 기계적인 운동을 벗어나 일탈의 여유로움을 추구하는 <트래픽>에서의 여정. 자크 타티는 이러한 인물들의 운동을 극화하지 않고 운동 그 자체를 감각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렇기에 자크 타티의 영화에서는 대사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채플린이 그랬듯이 대사보다는 인물의 몸짓과 운동을 통해 말하고자 시네아스트이다. 무성영화적인 아름다움. 목소리가 스크린을 장악한 시대에도 육체의 미학을 실현하고자 하는 시도. 그리고 <플레이타임>에서 그의 미학은 정점에 이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크 타티의 다른 영화들과 <플레이타임>의 차이점이 있다면 <플레이타임>은 윌로가 중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다른 영화들에서 자크 타티 본인이 직접 연기한 윌로라는 캐릭터가 운동의 중심이고 영화가 그의 운동을 따라갔다면 <플레이타임>에서는 윌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는 화면 안의 여러 캐릭터 중 한 명일 뿐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움직이고 운동을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자크 타티가 다른 영화들에서는 채플린이 방랑자를 찍은 방법론을 따라갔다면 <플레이타임>에서는 한 단계 더 도약하는 데 성공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플레이타임>은 그의 전작 <나의 아저씨>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명성을 얻게 된 자크 타티가 자신의 영화적 한계를 실험해 보기 위한 영화였다. 자크 타티는 이 영화를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했고 미래도시처럼 보이는 거대한 세트를 직접 구현했다. 이 영화는 당시 프랑스 영화 중 가장 제작비가 많이 든 영화였다. 이렇게까지 자크 타티가 힘을 쏟아부은 것은 영화 속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물들을 민주적으로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이전의 영화들이 윌로를 중심에 두고 윌로의 운동을 따라갔다면 <플레이타임>에서는 화면 속 미장센과 인물들의 물성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목표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화면. 생동감 있게 운동하는 인물. 영화 속에서 윌로는 언제나처럼 움직이고 운동하지만 동시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윌로와 같이 운동한다. 이 영화에서 윌로는 화면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자크 타티의 카메라는 윌로가 아닌 윌로가 있는 화면 자체를 찍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적인 화면. 민주적인 카메라.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 로열 가든 레스토랑에서 일어나는 한바탕의 소동. 이 시퀀스에서 윌로는 중심에 있지 않다. 하지만 화면 속의 모든 인물들은 마치 자신이 윌로가 된 것 마냥 실수하고 공간을 어질러 놓는다. 실수라는 운동. 운동의 연쇄. 자본주의가 규정한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 이 운동을 통해 자크 타티는 영화 속 인물들이 아주 잠시나마 자본주의의 순환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자크 타티가 생각하는 유토피아.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여담으로 한 가지 더.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제작비와 자크 타티의 노력이 들어간 <플레이타임>은 전작과 달리 상업적으로 완전히 외면당하며 자크 타티를 빚더미에 앉게 했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 관객들은 자크 타티의 정수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그의 다음 장편 영화인 <트래픽>마저 상업적으로 실패한 후 그는 자포자기한 것처럼 가장 실험적인 영화인 <퍼레이드>를 찍은 뒤 필모그래피를 마쳤다. 종종 영화사에서 거대한 예술적 성취는 그에 대응하는 거대한 상업적, 혹은 사회적 실패와 등가교환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미학적 성취를, 자크 타티라는 위대한 이름의 필모그래피를 영화사는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