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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Nov 02. 2022

가훈을 정하며 생각한 것

부부싸움의 효능

초등학교 1학년인 둘째 린이 학교에서 ‘우리집 가훈 써 오기’ 숙제를 받아왔다. 아마도 이 숙제의 답안으로 제일 유명한 건 박찬욱 감독의 것일 듯하다. “아니면 말고”.     

 

이튿날 종팔이는, 선생님께서 “세상에 뭐 이딴 가훈이 다 있냐?”며 새걸 받아오든가 아니면 뭔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들어오랬다고 전했다. 나는 한번 정한 가훈을 무를 수는 없다면서, 즉 이 일에만큼은 ‘아니면 말고’를 적용할 수 없다면서, 이렇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덧붙였다.

“현대인들은 자기 의지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매우 오만한 태도, 세상에는 의지만 가지고 이룰 수 없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닥쳐오는 좌절감을 어찌할 것이냐.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고 그래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땐 툭툭 털어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이 경쟁만능의 사회에서 참으로 필요한 건 포기의 철학, 체념의 사상이 아니겠느냐. 이 아빠도 〈복수는 나의 것〉으로 네 친구의 아빠가 만든 영화를 능가하는 흥행 신기록을 세우고 싶었으나 끝내 그 20분의 1밖에 안되는 성적으로 끝마쳐야 했을 때 바로 그렇게 뇌까렸던 것이다. ”아니면 말고...."

- <박찬욱의 몽타주>, 마음산책     


이 정도는 못 돼도, 나도 제법 재치있고 멋진 말을 써주고 싶었다. 아이가 나중에 커서 “우리 부모님은 어딘가 좀 다른 분들이었어”라고 회상할 수 있게. 집안 대소사의 대부분은 내 의견대로 하지만, 그래도 가훈인데 남편과 상의해야 할 것 같아 메시지를 보냈다. 이럴 때 나는 대체로 지나치게 진지해지는 편이고(8살 딸이 노년에 자서전 쓰는 장면을 상상한다), 남편은 지나치게 가벼워지는 편인다(‘쿨함’을 잘못 배웠다). 일단 남편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로 몇 개 던져본다.      


나 : ‘행복하게 살자. 인생 짧다’

권 : ‘정직’ 어때?

나 : 구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남편이 한동안 양자역학에 꽂혀서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권 : 좋네.

나 : 안 좋아. 그게 뭔 소리야, 대체.  

권 : ‘저탄소 녹색성장’은 좀 지났으니까... ESG! ESG 좋다.

나 : 선거 표어 만드냐?

권 : 지속가능. 힙하지 않아?

나 : 안 힙해, 식상해. ‘시인의 감성과 시민의 감각을 가지고 시시한 일상을 잘 가꾸며 사는 사람’ 어때? 서한영교 시인이 쓴 글이야.

권 : 그냥 욕망을 드러내면 어떨까?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인 서울’. ‘강남3구 거주’     


팽팽히 맞서다 간신히 합의를 본 우리집 가훈은 이거다. ‘일상이 중요하다’. 뭔가를 성취하는 데에도, 인생이 행복해지는 데에도 가장 중요한 건 일상이니까. 나의 진지함도, 남편의 ‘똥 쿨함’도 한 발짝씩 물러선 결과다.

그날 저녁, 린에게 어렵게 정한 가훈을 알려줬더니 아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벌써 써서 냈는데?”

응?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뭐라고 적었느냐고 물으니 아이가 그런다.

“작은 고추가 맵다.”

아니, 대체 왜?

“선생님이 가훈은 우리집의 속담 같은 거라고 하시길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속담이 ‘작은 고추가 맵다’거든.”

린은 반에서 가장 키가 작다. 그건 니 좌우명으로 하고 가훈은 엄마, 아빠가 정한 걸로 하자고 구슬려봤지만 아이는 다시 써서 내기 귀찮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일화에서 중요한 건 이거다. 집안 대소사의 대부분은 내 의견대로 하지만, 그래도 가훈인데 남편과 상의해야 할 것 같아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 이것이 나의 뿌듯함이고 자랑이다.    

  

나와 남편은 참 다르다. 아마 모든 부부가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다르니까. 서로의 비슷함을 찾는 게 연애라면,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는 게 결혼생활인지도 모른다. 얼마나 다르냐 하면...     


사례 1.

언젠가 남편의 생일날 야심차게 이벤트를 준비한 적이 있다. 그 무렵 내가 이용하던 일대일 영어과외 서비스의 체험권을 예약해서, 집 근처 카페로 선생님을 부른 것이다. 남편에게는 시간과 장소를 일러주고, 나가 보면 내 생일 선물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남편이니 분명 재미있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이 30분도 채 되지 않아 집에 돌아왔다. “준비해준 건 고마운데, 나랑은 안 맞는 것 같아. 취소했으니까, 그냥 네가 1회 수업 더 들어”라며. 어안이 벙벙했다. 서운함을 넘어 ‘이게 재미있는 이벤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았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남편은 배우는 걸 좋아하지만, 돈을 내고 배우는 건 싫어한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그가 얼마나 돈 쓰는 걸 싫어하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날이었다.  

    

사례 2.

동료나 지인들의 결혼식이 있을 때마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가고 싶어했고 남편은 혼자 얼른 다녀오고 싶어 했다. 나는 그나마 주말이 함께 있는 날인데 어차피 결혼식 가는 거 같이 가자는 생각이었는데, 남편은 아이들 데려가서 고생할 필요 있냐고 했다. 몇 번이나 다투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남편을 배려해 남편 지인의 결혼식에 따라가려는 거였고, 남편은 나를 배려해 혼자 보내려는 것이었음을. 서로 상대방의 배려를 받아들인 결과, 나는 친구 결혼식에 혼자 갔다오고 남편은 친구 결혼식에 온 가족과 함께 간다. 응? (씨익, 승자의 웃음.)     


어떤 다름은 재미있고, 어떤 다름은 절망스럽다. 때로는 양보하고, 때로는 양보받고, 때로는 포기하고, 때로는 맞서서 합의점을 찾는다. 이 가운데 결혼생활의 묘미는, 양보하거나 양보받는 게 아니라 포기하거나 맞설 때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양보가 내 의지로 웃으며 물러나는 거라면, 포기는 내 자아가 꺾여 무릎 꿇려지는 일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설득하고 버티고 싸우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게 마련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보지 않으면 ‘포기’는 되지 않으니까. 맞서서 설득시키거나 내가 포기하는 단계까지 가지 않고, 즉 나를 이해시키거나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지레 어느 한쪽의 취향과 의견대로 끌려가는 건 부작용이 있다. 억눌린 울분이 폭발하거나,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이 극도로 줄어 교감 없는 파트너가 되거나.

나와 남편은 참 달라서, 나의 이런 생각에 남편이 백프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를 남편도 보고 함께 이야기 나누길 원하는데 남편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굳건하고 진실하다는 걸 이제는 잘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가끔 같이 영화 볼 것을 요구하고 남편이 읽고 있는 양자역학이나 주식 책에 대해 묻는다. 그것이 우리의 결혼생활을 더 풍성하게 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편은 본인이 여기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믿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에게 동조해 준다. 나 역시 그가 내게 동조해서 영화를 ‘봐 준다’는 걸 안다.


이렇게 서로를 파악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설득과 토론과 다툼과 포기가 있었는지는 상상에 맞기겠다. 어쨌든 덕분에 우리는 어디까지가 양보이고 어디부터가 포기인지, 설득된 건 무엇이고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건 무엇인지를 제법 정확히 알게 되었다. 이건 서로에게 더 정확하게 고마워하고 미안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 부부의 공유지가 어디이고 휴전지가 어디인지, 침범할 수 없는 사유지는 어디까지인지 파악해 갈수록 타협의 기술은 능숙해지고 속도는 빨라진다. 가훈같은 건 십분 만에 카톡으로 정할 수 있는 내공에 이르렀다. 그 가훈이 폐기처분되는 것도 순식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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