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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Nov 26. 2022

운동은 혼나면서 배워야만 하나 (1)

성취의 그늘

율이 처음 피겨 스케이팅에 관심을 가진 건 <스피닝>이라는 그래픽노블을 읽고 나서였다. 12년 동안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살았던 작가가 스물한 살이 되어 직접 쓰고 그린 자전적 이야기로,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아이스너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책이 풍기는 묘한 분위기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피겨 스케이팅에 대한 작가의 감정은 복잡하고 찐득하다. 화려하지만 어둡고, 성취이자 좌절이다. 더 잘 해내고 싶기도 하고 벗어나고 싶기도 한 작가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도 덩달아 괴로워진다. 작가가 자신의 내면을 진실하고도 집요하게, 깊이 파고 내려간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10대 시절 특유의 어두운 감정들이 짙게 배어 있는 이 그래픽노블에, 율이 반해버렸다. 피겨 스케이팅을 하며 즐겁기만 한 이야기는 분명 아니었는데, 책에 드리운 그늘조차 매력적으로 느껴진 건지, 혹은 오히려 그런 어두움에 매혹된 건지, 율은 이 책을 족히 수십 번 쯤 읽었다. 그리고 결국, 피겨 스케이팅을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작가가 진하게 사랑하고 괴로워했던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해 보고 싶어 했다. 무언가에 이끌리는 9살 아이의 순수한 애정이 사랑스러웠다. 그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고,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싶었다. 그렇게, 율의 손을 잡고 목동 아이스링크장을 처음 찾았다. 그게 2년 전이다.

스케이트장에 가는 날이면 아이는 아침부터 설레어 했다. 평소에도 주변에 사람이 있든 말든 스케이트 동작을 흉내내는 통에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고, 코로나 때문에 링크장 운영이 중단될 때는 “코로나 미워!!”라며 소리내어 울었다. 얼음판 위에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아이를 보는 일은 내게도 신기했다. 한발을 번쩍 들고 스파이럴을 할 때면 물고기 같다고, 새 같다고, 아이 안에 잠자고 있는 다른 어떤 생명체가 깨어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율은 “스케이트를 탈 때 귀에서 바람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자신은 그 바람소리 때문에 스케이트를 사랑한다고 했다.  

이후 우리는 몇 번, 링크장도 옮기고 코치님도 바꾸었다. 중간에 잠깐 그만둔 적도 있다. 생각보다 돈이 너무 많이 드는 운동이라는 걸 깨닫고(처음 방학특강을 신청할 땐 분명 월에 7만5천원이었는데, 어느새 회당 그 가격을 내고 있었다!) 계속 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건데, 율이 너무 우울해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저는 피겨 스케이팅을 좋아하는데 우리 집엔 동생도 많고 돈이 없어서 그만뒀어요’라고 말했다. 그걸 보는 게 더 괴로워, 결국 석 달 만에 다시 시작했다.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아이가 그만하고 싶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버텨 보자, 감당할 수 있는 횟수로만 레슨을 받더라도 어떻게든 그만두지만 말자. 

그렇게 시작하고 이어온 운동인데, 요즘 아이가 피겨 스케이팅 때문에 힘들어 한다. 어찌 보면 <스피닝>의 틸리 월든 작가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경로인지도 모른다. ‘할 줄 모르던 걸 할 수 있게 되는’ 초반의 즐거움은 지나고 한 기술을 구사하기 위해 무자비한 반복 연습이 필요한 시기가 됐다. 코치는 자주 화를 내고, 아이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압박적인 분위기를 느낀다. 그동안 만나온 그 어떤 어른도 자신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는데, 링크장에서는 고성으로 혼나는 일이 흔하다. 랜딩하는 발 방향을 여러 번 틀린 날 코치는 “오른발, 왼발 몰라? 일곱 살 짜리도 아는 걸 몰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훈련이 끝나고 스케이트를 벗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엄마, 이제는 스케이트를 탈 때 귀에서 바람 소리가 안 들려. 코치님이 혼내는 소리만 들려.”


(아이 데리러 갈 시간이네요. 다음에 이어서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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