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는 그럴 때 그렇게 내는 게 아니에요
나는 감정 조절에 서툰 사람이라 말실수가 잦다. 흥분하지 않는 것, 흥분할 때도 선을 지키는 것,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끝내 하지 않는 것, 이것은 내가 평생의 숙제로 붙들고 있는 과업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화내는 것에 대해 어릴 때부터 자주 말해 왔다. 감정적으로 화내는 것은 좋지 않다, 화는 냉철한 판단 뒤에 이성적으로 내는 것이다, ‘화낼 만한 일’에 ‘적절한 상대’에게 ‘적절한 강도’로 내야 한다. A에게 화낼 일을 B에게 화내면 안 된다, 특히 B가 만만하기 때문이라면 더더욱 옳지 않다, 화내는 강도 역시 중요한데 얼만큼 화낼 일인지를 차갑게 판단해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이었고, 내가 못 하기 때문에 더욱 간절해지는 당부였다.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버럭 짜증을 낸 날에는 꼭 사과하려고 애썼다. 엄마가 잘못 화냈어,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어. 남편도 비슷해서 언젠가 한번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도 들었다. “아빠가 사실은 엄마한테 화가 났는데, 엄마가 무서워서 너희에게 화를 냈어. 미안해” 지나치리만큼 솔직하게 고백하며, 우리 부부는 분노에 대해 가르쳤다.
그런데 그 모든 교육과 당부가 링크장에서는 해당되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화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배워온 아이들에게, 코치는 예외였다. 어떻게 해도 되는 사람,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는 곳.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코치만 그랬던 게 아니다. 링크장을 옮기고 코치를 바꿔도 누군가가 아이에게 소리지르는 모습은 변함 없이 재생되었다. 아이가 상처받을까봐도 걱정, 괜찮았다고 말하는 날에는 ‘이렇게 폭력에 익숙해지는 건가’ 싶어 또 걱정. 급기야 율이 “이제는 피겨를 그만둬도 그렇게까지 아쉽지 않을 것 같아”라고 말한 날에는 마음이 지옥이었다. 돈도 시간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 이놈의 피겨, 그래 그만둬 버리자 싶었지만 그만두는 이유가 피겨가 싫어서는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졌다.
‘차갑게, 이성적으로’를 필사적으로 되뇌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코치님, 화내지 않고 가르쳐주시면 안될까요? 아이가 점점 피겨에 흥미가 떨어져 가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다고 코치가 변할까 자문해 보면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친하게 지내는 스포츠 평론가가 ”코치들은 화내는 게 자기 일이라고 생각해. 특히 잘하는 선수들을 가르칠수록 더 그래“라며, 코치에게 그런 말 하는 데 반대 의견을 주었다. 평생을 그런 방식으로 배우고 가르쳐 왔는데, 부모 한 명의 말 한마디에 바뀔거라고 기대하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오히려 ’이 엄마 극성스럽네, 오케이 네 딸은 대충 가르치마‘라며 성의 없게 나오진 않을까.
고민 끝에 나는 딸에게 말했다.
엄마가 코치님한테 이야기는 해 볼게. 근데 그렇다고 확 바뀌실 것 같진 않아. 그래서 네 생각이 중요한 것 같아. 내 마음은 괜찮나?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인가? 여기에 가장 정확히 답할 수 있는 건 너야. 피겨를 계속 하고 싶은 마음도 진심이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진심이라는 걸 엄마가 알아.
엄마가, 감정적인 화는 되도록 내지 않는 게 좋고 내더라도 맞는 상대에게 적당히 내야 한다고 말했지.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세상이 꼭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아. 어떤 사람은 힘이 세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내키는대로 화를 내고, 어떤 사람은 힘이 없어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누구에게도 화낼 수 없기도 해. 더 솔직히 말하면, 엄마나 선생님이 너에게 가르치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래. 세상에 통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 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맞는 게 맞는 거고, 틀린 게 틀린 거야. 작동하느냐의 여부로 틀린 게 맞는 게 되지는 않아.
결국 나는 인정한 셈이다. 아이가 나의 교육과 보호가 통하지 않는 세계로 들어갔음을. 이렇게나 일찍, 이렇게나 무방비하게. 이게 나와 아이가 살고 있는 우리 사회라면 그건 또 그것대로 받아들여야 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이제 더이상은 학교에서 교육을 핑계로 체벌이나 폭언을 용인하지 않듯이, 운동을 가르치는 교육자들도 혼내는 게 가르치는 게 아님을, 화내는 건 그냥 본인이 감정 조절에 실패한 것일 뿐임을, 상식처럼 받아들이는 날이 오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