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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며 읽는 자세

<논어> 독서모임 후기

by 캬닥이

몇달 전에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를 들었다. 창간호 첫 이야기가 '읽기의 왕도', 최대의 효율로 글을 읽는 방법이었다. 선생 왈, 저자가 틀린 부분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한 문장 한 문장 물어뜯듯 읽고 비판하면 글을 더 잘 이해하고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듣고보니 그럴듯했지만, 이조차 비판을 하자면 '비판하며 읽기'가 읽기의 왕도라 할 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학자가 아닌 이상 나와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하는 글은 찾기도 어렵다. 좋아서 읽겠다고 고른 글이니 억지 주장을 하지 않는 이상 비판할 점도 안 보인다. 비판 능력이란 훈련으로 쌓이는 것이니, 억지라도 계속 부리다 보면 언젠가 다른 사람의 텍스트에서 나만의 생각을 만들어낼지도 모르겠다.


..위 문단은 나의 억지 주장이다. 선생은 자신과 비슷한 입장처럼 보이는 글도 비판할 점을 찾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날카롭게 좁히라는 취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사람은 글을 쓰기 전에는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기 전에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다 몇달이 지나 선생의 말을 마침내 반박할 수 있는 텍스트를 찾았으니, 바로 논어였다.


맞는 말만 천지라 비판하기 어려운 텍스트가 있는가 한편, 문외한이라도 한 마디 얹을 수 있는 텍스트도 있다. 이제와서 논어는 후자가 되었다. 다들 이렇게 말한다. 유교는 500년 간 한반도를 지배하며 조선을 망하게 하고 한국을 기울게 만들었다고. 유교에 아무 생각 없던 사람이라도 논어를 보며 욕하기는 쉬울 것이다. 인이 뭐냐는 제자의 물음에 뜬구름만 잡다가, 세상이 나를 써주지 않는다 한탄하는 것이 공자이니까.


그렇지만 이런 읽기야말로 생각없이 글을 읽는 것이다. 오래된 글을 읽을 때는 말이 안 된다거나 쓸모없는 문장이라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이 어떻게 고전이 되었는지 당대 사람들에 이입해야 조금이나마 글의 의미에 닿을 수 있다. 고전의 장점은 학자들의 해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해설을 읽다보면 역사적 맥락이 조금씩 보인다. 이것도 부족하면 역사를 따로 확인해도 된다. 새로운 맥락 속에서 논어의 문장은 전혀 다른 색을 띄게 된다.


물론 책 한 권 제대로 읽기도 힘든데 고전을 제대로 읽기 위해 해설까지 찾는 건 욕심과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나도 독서모임이 있으니 이리저리 찾아본 것이다). 맥락이 없이도 문장 자체를 받아들이고 여러 번 곱씹을 수 있다. 감수성이 충분하다면 2천년 전 문장에서도 오늘날에 맞는 의미를 찾는다. 독모에서 사람들은 듬성듬성한 문장을 좇아 올라 자기 나름의 답을 내렸다. 학이편 첫 장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힌다는 것이 이런 의미일 것이다.


'수용하며 읽기'도 '비판하며 읽기'만큼 어렵다. 이번처럼 글에 따라 그렇기도 하고, 시대와 독자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특히나 지금은 글을 얇게 읽는 시대다. 비판하며 읽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받아들이며 읽기를 익혀야 한다.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양장) : 알라딘

논어의 맥락을 알려주었던 책. 저자가 논어를 고루한 글로 보지 않아서 좋았다. 이분의 책을 찾아본 것도 열린연단 강연에서 에너지 넘치게 논어를 설명하시는 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책 중간중간 공자나 공자의 제자가 큰 깨달음을 얻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으리란 묘사가 많다. 논어의 구절 하나하나에 감탄했던 모임 분들도 그렇고, 나도 이런 감수성을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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