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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pr 17. 2024

의대 정원 확대 논란을 바라보며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작금의 의대 정원 확대 논란을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았다.      


   진보 진영의 공공의대 설립 안에 비해 윤석열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은 훨씬 더 급진적이다. 총선에서 이기기 위한 포석이라기엔 너무 리스크가 컸다. 의사가 많아지면 지방 사람들의 의료 접근성이 좋아질 것이고 코로나와 같은 무서운 감염병 상황에서 의료진의 소진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있는 반면, 이과 전공자들이 의대로 몰리면 과학기술 인력난이 심화되리라는 우려도 있다. 이런 걱정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고려한 걱정인 반면, 전공의와 의대 교수들의 반대 투쟁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집단 이기주의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의사단체의 반대 논리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우리나라의 의사 수는 상대적으로 적으나 의료의 질을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의사가 부족하다고 할 수 없다. 둘째, 의대 정원을 확대하면 교육의 질이 떨어질 것이다. 셋째, 의사 수가 많아져도 필수 의료과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주장은 통계를 보는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에 판단을 보류하더라도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훌륭한 의료진이 차고 넘치는데 그들을 교수로 채용하고 대학 건물과 시설을 증설하면 될 일이다. 필수 의료과가 인기 없는 이유는 위험이 크고 보상이 적기 때문인데 이는 의료 수가를 높여서 해결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의료계에 종사하지 않는 필자로서는 이런 의견이 타당하기를 바랄 뿐이다.) 소위 인기 과인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의 의료 수가는 낮추고 비급여 항목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서 의료 양극화를 줄이고 지나친 의료비 지출도 줄이는 효과를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손보험의 보장 영역을 줄이는 것도 의료비 지출 감소에 기여할 것이다.      


    국민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인다는 것은 공동선의 이상(공동체주의 관점)에 부합한다. 물론 공동선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도 있고, 그들을 비난할 수도 없다. 반대 의견은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가치 다원화 시대에 보편적 선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저자가 소개하는 정의에 대한 3가지 관점에 따라 의료 개혁 논란을 바라보면 전격적인 의대 정원 확대는 공리주의적 접근에 해당한다. 국가가 주도하여 의사 집단의 공리를 줄임(기득권을 나눔)으로써 의료 서비스 소외 집단의 공리를 높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는 강제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기득권을 가진 집단이 약자들을 걱정하여 기득권을 내려놓자고 결의하기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제 집행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자유주의 관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 때문에 전공의들이 분노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 의사의 지위에서 오는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엄청난 수의 후배들이 쏟아져나옴으로써 선배 의사들에 비해 생존경쟁이 두 배로 거세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의 두려움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도 자신들의 보상이 줄어드는 만큼 후배 전공의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공동체주의 관점). 


    인류는 권위주의 시대에 항거하여 자유와 인권 사상을 발전시켜 오다가 이제는 내가 제일 중요하고 나의 권리를 건드리는 사람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자유지상주의에 도달했다. 너무 많이 왔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건국한 나라로 사회 전반에 기독교 정신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공동선을 찾는 과정에서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은 편이지만, 우리나라는 종교적 다원주의가 미국보다 심하기 때문에 합의를 이루어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스님과 사제, 목사님들이 함께 대화하는 프로그램이 생기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보는 동시에 공통점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원하는 좋은 삶(선 또는 미덕)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작은 합의라도 이루어내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국민 공감대라는 큰 나무를 키워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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