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의 <하녀>(1960)과 장 주네의 『하녀들』(1947)
<하녀>는 1960년 김기영 감독이 발표한 한국의 스릴러 영화로 금천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해 만들어졌다. 하녀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인 이 영화는 한 중산층 가정에 하녀가 들어오면서 생긴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녀>는 명보극장에서 개봉했을 당시 10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했으며, 1960년 한국최우수영화상, 1961년 영화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8년에는 세계영화재단(WCF)의 지원을 받아 디지털 복원이 이루어졌다.
영화 <하녀>는 계단을 두고 1층과 2층으로 나뉜 서구적 이층집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그로테스크한 미장센 속에서 시종일관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특히 김기영은 비가 세차게 내리는 소리, 창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앵글, 피아노의 파쇄적인 음향이나 어둑하고 음울한 조명, 머리로 계단을 내리찧는 소리 등을 이용해 근대적인 불안감을 극대화해낸다. 그렇다면 김기영이 이처럼 시청각적으로 구현한 '근대적인 불안감'이란 무엇인가?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하녀>가 탄생한 1960년대의 한국 사회는 6.25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국가 경제 성장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 시기에 있었다.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이 속하는 '중산층' 계급이 등장한 것도 이때이다. 신분제가 사라진 사회에서 경제적 격차가 계급으로 발달한 것이다. 영화 <하녀>를 관통하는, 외부에서 침입해 가정을 파괴하는 하녀라는 침탈자에 대한 공포는 이런 계급의 형성에서부터 온다. 빼앗기는 것에 대한 공포는 빼앗길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한데, 신(新) 부르주아-중산층은 그러한 공포에 쉽게 이입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1960년은 국가 주도의 근대화 담론이 본격적으로 유통되며 근대와 전근대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못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침탈자인 '하녀'는 근대의 문물로 이루어진 주택, 즉 근대의 견고한 구조 속에 하녀라는 전근대적 존재로서 침입한다. 말하자면 <하녀>는 경제적·사회적 위상을 누리는 중산층의 평화가 한 명의 침탈자를 통해 파괴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근대의 질서를 전근대적 존재가 헤집고 들어와 해체하는 공포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하녀는 무엇으로서 집이라는 구조 안에 침입하는가?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영화 속 쥐의 상징성을 먼저 해명해야 한다. '쥐'는 이 영화의 핵심적인 메타포 중 하나이다. 하녀는 동식의 부인이 쥐를 보고 놀랐기 때문에 집에 들어오게 되고, 집에 들어온 후로는 아무렇지 않게 그 쥐를 잡아챈다. 그리고 하녀에 의해 실제의 쥐는 잡혔지만 쥐를 잡기 위한 쥐약은 남아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중심 소재가 된다. 하녀는 쥐약을 통해, 혹은 쥐약이라는 거짓말을 통해 창순을 죽이고 부인은 그 쥐약을 빼앗아 하녀를 죽이려다 실패한다. 이후 하녀는 동식과 함께 쥐약을 먹고 자살한다. 이렇듯 영화 <하녀> 전반에 쥐라는 상징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처럼 영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인 쥐는 어째서 영화 초반에 일찍 퇴장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실제 동물로서의 쥐를 대신해, 쥐의 위치에 대응하는 인물이 쥐의 죽음과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로 '하녀'다. 그는 영화 초반 죽은 쥐를 대신하는 또 다른 쥐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 <하녀>는 외부에서의 내부를 향한 침입, 구체적으로는 근대에 대한 전근대적 존재의 공격, 그리고 이러한 침탈로 인해 망가지는 구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내부에 침입해 구조를 무너뜨린다는 '하녀'의 침탈자적 면모를 가장 명확히 암시하는 것이 바로 쥐다. 영화가 발표된 1960년대 초반은 대국민적인 쥐잡기 운동이 한창 성행하던 시기였다. 국가 주도로 근대화가 이루어지던 시기, 곡식을 훔쳐 먹는 쥐는 국가적으로 사냥해야 하는 존재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쥐가 유독 배척된 이유는 인간의 집에 들어와 인간의 몫을 빼앗아 먹는 침탈자이기 때문이다. <하녀>의 '하녀'가 갖는 행동 양식도 이와 흡사하다. 그는 동식의 집에 들어와 그 안에 존재하던 것들을 무너뜨리고 잡아먹는다. 하녀가 처음 집에 들어와 한 행동을 통해 그의 이러한 속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하녀는 동식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찬장을 열어보며 빼먹을 것을 찾는다. 찬장 속에서 무엇인가 긁어먹기 위해 나타나 부인을 깜짝 놀라게 했던 쥐처럼 말이다. 그 과정에서 다시 '진짜 쥐'가 등장하지만 하녀는 부인과 달리 전혀 놀라지 않는다. 근대에 속해 전근대의 산물,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주택의 침입자인 쥐를 보고 까무러칠 수밖에 없었던 동식의 부인과 달리 하녀는 쥐와 지평을 공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일한 전근대의 침입자이고 인간의 것을 빼앗으려는 존재이다.
사실 하녀와 쥐는 근대의 거대한 구조물, 중산층 가족의 2층짜리 집이라는 견고한 공간을 무너뜨리기엔 물리적으로 지극히 연약하다. 하지만 그들은 내부로 침입해 그 안을 파고들어 파먹는 방식으로 자신보다 거대한 구조를 무너뜨린다. 영화는 하녀에게 '쥐'라는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쥐가 가진 성질과 이미지를 하녀에게 전이시킨다. 그리고 쥐가 내포하는 이미지란 침략자로서의 면모 외에 모방자로서 주는 공포 또한 포함한다. 그렇다면 쥐는 어째서 모방자로서의 공포를 내포하는가?
쥐에 관한 설화 중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친숙한 것은 아마 '손톱 먹는 쥐'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사람이 버린 손발톱을 먹고 사람 행세를 하는 쥐의 이야기를 다룬 이 설화는, 민간의 곡령숭배사상 아래에서 곡식을 훔쳐 먹는 쥐가 부정적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탄생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쥐는 인간의 것을 훔쳐 먹고, 나아가 인간을 모사하며 인간의 자리까지 빼앗으려고 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던 셈이다. 근대적 구조에 들이닥치는 침략자이자 모방자로 묘사되는 <하녀>의 하녀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쥐라는 메타포를 통해 하녀는 양옥집이라는 구조 안에 들어와 그를 무너뜨리는 침입자의 위치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색을 모방하며 그들의 자리를 노리는 자로서의 공포까지 부여받는다.
하녀가 욕망하는 것은 일관적으로 '남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자신만의 것이 없는 존재이다. 그에게서 가장 특징적이라고 할 만한 요소인 담배조차 하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기 보단 공장의 여공들을 따라하며 만들어진 취향이다. 하녀는 피아노를 배우는 조를 질투하고 조가 사랑하는 동식을 욕망하고 동식의 부인이라는 자리를 탐낸다. 동시에 이와 같은 대사로 확인할 수 있듯, 자신이 겪었던 불행을 그 원인이 되는 동식의 가족에게 그대로 돌려주려고 하기도 한다. 타인의 상을 그대로 모방하고 동시에 그 거울상을 밖으로 내보이는 거울처럼 그의 판단 혹은 행동 양식은 모두 타인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는 분노조차 '전에 있던 집'의 사람들을 모방함으로써 느끼며, 자신을 '바람 난 남편을 보는' 부인의 위치에 대입해 표현한다. 실제로는 자신이 불륜 관계에 있음에도 말이다. 나아가 하녀는 영화 후반부에서 계속 자신이 부인의 위치와 입지를 차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공고히 하려고 든다. 그것은 동식의 부인이라는 위치를 빼앗기 위함이면서 동시에 부인이라는 존재를 모사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자신의 것이 없는 존재로서 하녀가 존재를 확장하는 방법은 손톱을 먹고 인간이 된 쥐처럼 타인을 모방하고, 나아가 설화 속의 쥐가 손톱의 주인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듯이 원본의 자리를 탈취하는 방법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녀는 왜 이런 캐릭터여야 했을까? 작품 내적으로, 그는 실체감을 상실하고 쥐나 전근대 등의 상징을 함축하는 그로테스크한 인물이어야 했다. 이름조차 한 번 호명되지 않고, 자신의 것을 갖추지 못해 타인을 탈취하는 인물이어야만 관객에게 미지의 것이 주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 외적으로,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하녀는 하녀이기 때문에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는 가난한 처지로 근대화에 짓눌려 일하며 자신의 개성이나 자아를 완전히 상실하고 살아가는 여성이 지극히 많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신으로서는 스스로의 개성을 확보할 수도 보호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므로 하녀는 자신만의 것을 가지기 위해 남을 모방하고 빼앗아야만 했던 셈이다.
이렇듯 '타인을 모방하는 하녀'가 등장하는 작품은 비단 <하녀>뿐만이 아니다.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에서는 보다 노골적으로 모방자로서의 하녀를 그려낸다. 『하녀들』에 등장하는 하녀 솔랑쥬와 클레르는 모시는 주인인 마담이 외출한 밤이면 주인의 방에 들어와 그의 옷을 입고 장신구를 걸치며 주인 흉내를 낸다. 두 하녀는 서로 번갈아 가면서 이른바 '마담 놀이'를 하고, 그를 통해 계층 상승의 욕구를 채운다. 이 하녀들은 모방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마담의 애인을 밀고하고 마담을 독살해 그의 입지를 빼앗고자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마담 역을 맡은 클레르는 솔랑쥬를 시켜 자살하게 된다. 클레르는 마담을 연기하며 하녀의 손에 죽음으로써 마담을 모방해내고, 솔랑쥬는 언니-마담을 죽임으로써 살인자라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이 이 희곡의 특징적인 부분이다.
모방으로서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방은 '나'라는 주체가 타자처럼 '되는' 것으로 나의 변화를 내포한다. 다른 것을 닮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거울상을 비추는 행위일 수도 있지만 행위 주체가 겪는 변화이며 어쩌면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다. 아이가 거울상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자기 주변에 있는 어른들을 모방하면서 삶의 규칙을 배워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솔랑쥬의 모방은 이러한 성장을 이루어낸다. 『하녀들』에서 클레르의 자살을 돕기 전 솔랑쥬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솔랑쥬: ... 오, 마담... 난 이제 마담과 동등해요. 난 이제 고개를 들고 걸어요..., ...옷이요? 이제 그것들을 잘 간직하세요. 동생과 나에게는 밤에 몰래 입던 우리의 옷이 있었죠. 하지만 이제 나는 내 옷을 가지고 있어요. 이제 난 마담과 동등해요. 이제 난 범죄자들의 붉은 옷을 입고 있어요. ... 이제 난 세상에서 가장 야만적인 위대성을 쟁취했어요. 마담은 나의 고독을 알아차리는군요. 그래요, 이제 난 혼자예요. 내가 무섭죠? 마담에게 고약하게 굴 수도 있죠. 하지만 그만두겠어요.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세요 ... 난 이제 뭐든지 자신 있어요. ... 감히 누가 날 '얘야'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난 시중을 들었었죠. 시중드는데 알맞은 몸짓을 했었죠. 마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었죠. 난 내 몸을 굽혔었죠. 침대를 정리하느라, 유리창을 닦느라, 야채를 다듬느라, 문에서 엿듣느라, 열쇠 구멍에 눈을 갖다 대느라 내 몸을 굽혔었죠. 하지만 이제 난 내 몸을 꼿꼿하게 세워요. 꼿꼿하게 세워요. 난 목을 졸라 죽인 살인자예요. 마드모아젤 솔랑쥬. 자기 동생의 목을 조른 살인녀! 마담은 정말 섬약하시죠. 이제 나는 그런 마담을 불쌍히 여깁니다. 마담의 창백함과 마담의 비단 같은 피부를 불쌍히 여기고, 마담의 조그만 두 귀와 마담의 가냘픈 두 손목을 불쌍히 여깁니다...... 난 검은 암탉이에요.... 이제 우리는 마드모아젤 솔랑쥬 르메르시에다. 르메르시에, 르메르시에, 유명한 살인녀.
"이제 나는 내 옷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마담을 단순히 모방하는 데에서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낸다. 그는 범죄자이자 살인자로서 자신의 자아를 새로이 확립한다. 그리고 새로운 '옷'을 입고서 당당하게 마담에게 선언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마담과 동등하며 더는 몸을 굽힐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말이다. 그는 창백하고 연약한,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마담의 형질을 더는 선망하지 않으며 "검은 암탉", "살인녀"로서 자기 자신이 되겠다고 말한다. 최하계층에 속하는 소수자로서 하녀 솔랑쥬가 찾아나갈 수 있던, 선언하게 된 자아는 결국 범죄자인 것이다. 이렇듯 『하녀들』은 사회적 규율에 충실히 대응하는 마담이란 존재를 선망하고 또 모방하던 하녀가 사회 규율에 저항하는 존재로 거듭나 완성되는 일종의 성장극으로 읽을 수 있다. 여성학적 관점에서 보면 마담이 갖춘 사회적 여성성을 선망하던 하녀가 '연약함에 대한 선망'에서 벗어나 강인함과 자기주체성을 찾아나가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녀>를 읽는다면 하녀는 실패한 성장서사이다. 여기서 실패란 작품의 성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녀의 성장이 완성되지 못했음을 말한다. 『하녀들』의 하녀들과 마찬가지로 <하녀>의 하녀 또한 자살을 통해 삶을 맺으려고 한다. 그는 동식과 함께 자살함으로써 '그를 영원히 모시게 되는 것', 그리고 '하늘에서 그의 정식 부인이 되는 것'을 꿈꾼다. 하녀가 죽음을 택한 것은 자신이 한 차례 빼앗아 왔던 동식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함이다. 그는 끝까지 부인이라는 자리를 모방하며 선망하고, 타인의 것을 탐내는 존재로 기능한다.
그러나 <하녀>에서는 하녀의 이러한 욕망조차 완성되지 않는다. 함께 죽어주겠다던 동식은 쥐약을 마시고서야 자신의 영혼까지는 하녀에게 줄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는 매달리는 하녀를 이끌고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고, 하녀는 2층도 1층도 아닌 층계참에서 사망한다. 하녀는 결국 2층이라는 동식의 영역을 차지하는 것에도, 1층이라는 부인의 영역을 모방하는 것에도 실패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녀에게 허락된 공간은 그 둘 중 어디도 아니며 죽음과 서스펜스의 영역인 계단뿐이다. 부인의 위치를 모방해 계층을 상승하는 것도, 죽음을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자신만의 영역, 즉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도 하녀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심지어 결말 이후 등장하는 씬에서는 하녀의 모든 분투가 다시 전복된다. 모든 것이 상상일 뿐이었다는 결말 하에 젊은 하녀는 가부장의 난폭한 상상력 속에서 소비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쥐조차 아닌, "범의 입에 날고기"가 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동식은 관객들에게 말을 걸지만 그가 말을 거는 대상은 여자 때문에 패가망신할 위험이 큰 남성뿐이다. 그리고 여성 인물들은 그가 남성으로서 다른 남성에게 말을 걸 동안 문밖으로 퇴장하며 주체성을 박탈당한 타자, 대화에 참여할 수 없이 소외된 존재가 된다. 하녀라는 인물이 모방과 약탈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영역을 형성하는 성장 과정으로 보자면 <하녀>가 실패한 성장 서사인 이유다.
<하녀>의 두려움은 외부의 것이 내부로 침입해 '우리'라는 공동체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근대적 불안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렇기에 하녀는 미지의 침입자이며, 나를 모방하고 나의 자리를 빼앗는 침탈자로 그려진다. 특히 영화는 하녀에게 '쥐'라는 메타포를 부여함으로써 이를 이루어낸다. 쥐란 전근대성의 산물이면서, 손발톱을 먹고 나타나 나의 자리를 빼앗으려 드는 모방자이고, 곳간의 곡식과 대들보를 갉아먹는 침략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하녀를 이렇듯 약탈자이자 침략자로 묘사하는 면모는 어쩔 수 없는 불쾌감을 남긴다. 우리는 사회적 배경 속에서 익명의 하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중산층이 두려워하는 구시대의 공포란 결국 자신이 착취한 것들의 반항이다. 경제적 계급의 형성 속에서 '부리는 자'로 전락해야 했던, 그 결과 전근대성의 산물로 취급받는 하녀라는 인물이 나름의 반항에 실패하는 과정은 자연히 씁쓸한 끝맛을 남긴다. 목숨까지 사용해가며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더라도 결국 그에게 허락되는 공간은 1층도 2층도 아닌 계단뿐이다. 자신의 것도 자신의 사람도 남지 않은 하녀는 결국 죽음으로조차 구원받지 못한다.
사실 이러한 점은 김기영의 <하녀>가 현대에 지적받는 부분과 맞닿아 있다. 하녀를 그저 대상화된 타자로만 다루는 많은 하녀 영화가 그러하듯이 김기영의 <하녀>에는 하녀들이 받았던 현실적인 고통이 결여되어 있다. 하녀는 그저 영화 내에서 시대의 불안감을 투사하고 공포를 조성하는 악녀이자 마녀로 기능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녀>를 관통하는 불안감이란 곧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희생되었던 피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침입해 자리를 빼앗고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이다.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한 공포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미국 백인 문화처럼 말이다. 그런 공포를 부유한 자가 거느릴 수 있는 상징적 존재, 근대화되는 사회 속에서도 전근대적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던 하녀라는 인물로 구현한 셈이다. 소수자이자 가장 낮은 위치에 처한 취약 계층으로서의 하녀가 자기 파괴적인 수단으로나마 자아를 찾았던 『하녀들』과 비교해, <하녀>는 이런 점에서 사회문화적인 한계를 보인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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