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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 Jul 30. 2019

글을 쓰면 정말로 불행해질까?

무슨 업보인지 글을 쓰고 있는 당신에게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내가 글 쓰는 걸 싫어했다. 김소월, 버지니아 울프, 다자이 오사무…. 작가들이 자살하는 건 글을 쓰는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학을 하면 자신에게 골몰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의 슬픔에 빠져 죽게 된다고. 다른 아이들이 책을 안 읽어서 혼이 날 때 나는 책을 너무 읽어서 혼이 났다. 책은 적당히 읽고, 글은 취미로만 쓰라고 꾸준히 말리는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나는 보란 듯이 문학을 전공하는 고등학생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실은 그게 늘 억울하고 서러웠다. 글을 잘 쓰는 건 어디서든 도움이 되는 재능이다. 하다못해 자기소개서를 써주는 아르바이트도 있는 세상이다. 또래보다 조금이나마 글을 잘 쓸 줄 안다는 건 늘 내 자부심이었다. 그렇게 글쓰기를 전공한 지 6년째, 나는 엄마의 말에 공감하고 있다.






  "문학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업보다."


  글을 쓰는 친구들끼리 모이면 자주 그런 말을 한다. 스물두 살에 하기엔 지나치게 자조적인 농담이지만, 빈말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가끔 문예창작과에 다니고 있을 고등학생들을 생각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글을 쓰고 한 시간의 백일장 동안 남들보다 불행한 이야기를 쓰도록 길러질 열여덟 살들을 떠올린다. 개인적으로는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해 보낸 3년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 이외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그런 환경에 처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한다.


  고등학교 문예창작과는 당연하지만 한 명이라도 더 대학에 보내기 위한 시스템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은 희망적인 해결책이라곤 없는, 불행한 글들을 좋아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그렇듯 우리도 치열했다. 매일같이 글을 쓰다 보면 스스로의 불행과 우울로는 글감이 모자라게 된다. 우울한 노래를 듣고, 우울한 이야기를 읽고, 우울한 사람들을 만들며 글을 썼다. 매일 하는 합평 속에서 생산적인 비판과 원색적인 비난에 익숙해졌다. 선생님들은 그게 성숙해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성숙한지는 몰라도 불행해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글이 좋아 왔다던 아이들은 대학만 가면 절대 글을 쓰지 않겠다며 학을 뗐다.


  하지만 정말로 업보인 건지, 다들 아직도 글을 쓴다. 나도 그렇다. 문학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아름다운 문장을 보면 머리가 서늘해진다. 멋진 문장을 떠올린 날은 잠들 때까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침대에 누우면 내가 써놓은 문장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나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작가이자 독자다. 그래서 글을 쓰는 건 업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바꾸거나 피할 수 없는, 나에게 재난처럼 닥쳐오는 일들. 우리는 다른 말로 운명이라고 한다.






  아직도 엄마는 내가 글 쓰는 걸 싫어한다. 글로 밥벌이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하면 공기업이나 공무원은 어떻냐는 질문이 매번 되돌아온다. (이건 경제적 안정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제는 손목이 다시 아프다고 말했다가 노트북을 금지당할 뻔했다. 조금 입맛이 없는 날이면 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럴 거라는 말을 듣는다. 이젠 엄마의 걱정을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여전히 서운하기는 하다.


  글을 쓰면 정말로 불행해질까? 글쓰기를 정말 업으로 삼은 사람들에 비하면 짧은 식견과 경험이지만 그 말을 아예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가끔은 글을 쓴다는 게 나를 불행하게 한다. 스스로에 대해, 타인에 대해, 사회에 대해 사색하고 골몰하다 보면 터무니없이 슬퍼지기도 한다. 나의 사유를 얕은 글에 담아 내어놓은 날이면 부끄러움에 괴로워진다. 잘 쓴 글, 훌륭한 글들을 보다가 자괴감에 빠질 때도 있다. 내가 글을 쓴다고 세상에 도움이 될까? 오늘조차도 그런 고민을 했다. 글을 쓰지 않으면 느끼지 않았을 불행이다.


  하지만 불행해지지 않고 무언가를 잘할 수는 없다. 글쓰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수영이나 코딩이나 외국어를 연습할 때도 우리는 스스로를 끝없이 의심하고 우울해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성장이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무엇이든 끝을 보려면 아파야 한다. 중요한 건 그 끝에 불행 이상의 보상이 있는가다.


  나는 도착하지 못했다. 사실 끝이 어디 있는지, 어디쯤 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출발선에서 한 걸음을 떼고 엎어져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마가 깨지고 코피가 나도 계속 갈 생각이다. 글을 써서 생긴 불행에 자빠질 인생이라면 테니스를 쳐도, 그림을 그려도 자빠졌을 거니까. 또 끝엔 불행 이상의 보상이 있다고 믿으니까. 그리고 같은 업보를 짊어진 사람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으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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