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에 MBC에서 오늘 방영해준다는 소식을 보고 냉큼 구글 캘린더에 입력해놓고 기다리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캐나다에서 있을 때 개봉해서 쏟아지는 호평에도 볼 수 없어 안타까워했는데 드디어 이렇게 보게 되다니!
앞부분을 조금 잘려서 찬실이 소피의 집에 일하러 들어가는 부분부터 봤는데 이 영화, 대사 하나하나가 진짜 골 때린다.
영화 피디였지만 갑작스러운 감독의 죽음으로 실직하게 된 찬실과, 감독이지만 생계를 위해 소피의 불어 과외를 하는 불어 선생의 대화가 슬프다가도 이자카야에서 같이 술을 마시며 나누는 영화 취향에 대한 대사가 진짜 너무ㅋㅋㅋㅋㅋ 리얼리즘이라 웃겨서 죽을뻔했다ㅋㅋㅋ 영상 쪽 일을 해봤거나 시네필들이라면 이건 안 웃을 수가 없다, 정말로ㅋㅋㅋㅋㅋㅋ
툭툭 치고 나오는 위트 있는 대사들과 착하지만 잘 잊어버리는 소피와 귀신(ㅋㅋㅋ) 장국영까지, 정말 오래간만에 통통 튀는 대사들로 무장한 영화를 본 것 같다! 집주인 할머니로 나오는 윤여정 님의 대사는 또 어떤가. 자칫 코미디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이 영화의 중심을 확실히 잡아준다. 한마디 툭, 툭 내뱉는 그 대사들이 마음을 툭, 건드린다.
나이 40, 일만 열심히 하고 살았는데 남은 것은 하나 없는 찬실. 지금의 나와 뭐가 다를까. 남은 게 하나 없는듯한 저 허망한 느낌에 너무나도 공감이 된다. 때론 사무치는 외로움에 힘들어하지만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라며 끊임없이 고민하는 찬실은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라며, 사는 게 궁금해졌다고 한다. 그렇게 귀신 장국영과 이별을 한 찬실은 다시 시나리오를 쓴다. 등장인물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찬실을 위로하고 찬실은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다. 이 얼마나 복 많은 인생인가! 제목대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 다.
차진 대사들과 함께 이 영화의 설득력을 부여하는 건 강말금 배우의 연기이다. 어찌 이런 배우를 우리는 잘 모르고 살았나! 대사 하나하나와 표정과 몸짓이 찬실이라는 인물을 실존 인물이라 생각할 정도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검색하다가 얼마 전에 본 애비규환에서 호훈의 어머니로 나온 게 강말금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되고 무릎을 탁 쳤다! 천의 얼굴을 가지셔서 알아볼 수가 없었구나! 진짜 앞으로 배우님이 나오신다면 믿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독립영화들은 내가 어릴 때 뻔질나게 보고 다녔던 그 시절에 비해 너무나도 세련되었다. 서사를 끌어가는 힘도, 촬영과 결과물 또한 그렇고. 그저 상업적이지 않을 뿐이지 완성도가 떨어진단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저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를 좀 더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뿐이구나, 싶을 정도로.
주옥같은 대사들과 긴 여운을 남긴 김초희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리며, 마지막은 찬실이 한글을 배우던 주인 할머니가 쓴 시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 그 대사로 마무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