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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선 Nov 23. 2020

고양이 죽이기

매일 아침 집 앞에 공짜로 던져져 있는 서울신문을 보던 중에 조그맣게 나온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 기사는 ‘경의선 고양이를 죽인 40대 아저씨, 항소심도 실형’이라는 작은 기사였다. 마침 어제 세미나에서 고양이가 주제로 나온 철학책을 읽었는데, 그 내용과 겹쳐지기에 이 글을 쓴다.  

   

어제 이야기 역사 세미나에서 『고양이 대학살』을 읽었다. 책 제목 그대로 ‘그냥 고양이를 때려죽인다’는 내용이다. 나는 늘 이렇게 짧게 말하는 걸 좋아하지만, 이제는 좀 더 자세히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짧으면 짧을수록 말의 오해가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소화할 수도 없는 고양이 밥을 받아먹어야 하는 처지인 낮은 계층의 인쇄공들이 빗자루, 철봉이나 다른 연장으로, 부르주아들이 잉여 재산으로 키우는 애완 고양이의 등뼈를 내리쳐 끝장을 내 버린다는 내용이다.      


그냥 사건만 보면 잔인하기 이를 데 없고, 지금 애완동물을 아끼는 사람들이 고양이라는 생명체를 죽였다는 사실 하나에 생각이 꽂혀서 들고 일어날 것이고, 청와대 신문고에 글을 올려 또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법적 소송을 걸만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해관계가 엮인 곳에만 꽂히지 말고, 폭넓게 더 자세히 들여봐야 한다고 책은 말하고 있다.     


콩타는 그 사건을 노동자와 ’부르주아‘ 사이의 운명의 불균형, 즉 일, 음식, 잠이라는 삶의 기본적 요소에 있어서의 불균형에 대한 언급이라는 컨텍스트 속에 위치시켰다. 그러한 부당한 처사는 견습공들의 경우에 특히 극악했다. 그들은 동물처럼 취급되었던 반면, 동물들은 그들의 머리 위로 올라가 그 소년들이 차지했어야 하는 자리인 주인의 식탁으로 승진되었던 것이다.
-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 116쪽.    
 

쉽게 말해, 고양이를 죽인 행위는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였다. 하지만 인쇄공들은 오늘 신문기사에 나온 아저씨처럼 홧김에 고양이를 무작정 죽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당시에 존재했던 ‘고양이 죽이기 문화’를 교묘히 이용한다. 고양이 살해가 공개적인 폭동으로 바뀔 수도 있는 지점까지만 나아갔을 뿐이다. 그렇게 부르주아를 조롱하면서도 자신들을 해고할 구실은 주지 않는 단계에서 소동을 그친다. 쉽게 말해, 법적인 문제까지 갈 정도의 구실은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보면, 안타깝게도 그 아저씨는 법정까지 가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고시원에서 살던 그 아저씨는 취업 사기에 엮여 채무독촉을 당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경의선 숲길에 있던 어느 한 가게 앞을 지나다, 고양이 밥에 세제를 타고 고양이를 때려죽인 것이다.      


만약 그 아저씨도 ‘운명의 불균형, 즉 일, 음식, 잠이라는 삶의 기본적 요소’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고 보면 비약일까? 그래도 고양이 밥을 먹어야 할 처지는 아니니까, 그렇게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 밥과 김치만으로도 한 끼 식사가 가능한 시대라고 할 수도 있다. 김치가 없으면 밥만 먹을 수도 있다. 나도 종종 그렇게 끼니를 때우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다면, 채무독촉에 시달리면서 밥과 김치로 생명을 겨우 이어나가던 경험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런 혹독한 경험 없이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다.     


요즘은 은행들이 투자상품을 팔다가 서민들 돈을 날려 먹은 기사가 한창이다. 그런데 이런 금융권들의 장사가 하루 이틀이 아니다. 예방대책을 내놔봤자, 어차피 또 법의 틈새를 이용해서 주기적으로 되풀이할 것이다.   

   

그 피해에 휘말려 극단에 처하게 된 사람은 하소연할 곳도 없는 현실에 화를 못 이겨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또는 홧김에 길거리 고양이의 등뼈를 내려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구조를 만든 자들은 늘 잘 빠져나간다. 법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래서 저자인 로버트 단턴은 그 인쇄공들의 ‘단결’에 주목한다. 자신의 직업노동 안에서 단결을 위해 동지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그들이 부르주아들에게 가했던 고양이를 통한 모욕 또한 그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혼자서는 절제되지 못한 행동으로 법의 선을 밟기가 쉽기 때문에, 개인적인 행동은 위험한 것이다. 


또 그렇게 은밀한 돌려치기로 부르주아들에게 모욕을 가하면서도, 함께 배꼽을 잡고 데구루루 웃으며 승리의 기쁨을 나눌 사람들이, 우리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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