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7년도 더 지난 일이다. 산부인과 정기 검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운전대를 잡고 나는 그만 눈물을 툭 떨어뜨렸다. 첫째가 아들이니 둘째는 꼭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랬었는데, 둘째도 아들이라니 내심 기대를 많이 했던 나는 전화기 너머로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운한 마음에 그만 눈물이 나고 말았다.
나는 아들만 둘이다. 사람들은 종종 아들만 있는 엄마들 놀리기를 좋아한다. 아들만 둘인 엄마는 금메달은 언감생심 은메달이나 동메달도 아니고 '목 메달'이라며, 딸이 없어서 어쩌냐고, 아들은 잘 키워봤자 다 남 좋은 일 시키는 거라고 웃었다.
"선생님이 딸이 있었으면 얼마나 예쁘게 키웠겠어요. "
"맞아, 저런 엄마들은 꼭 아들만 있더라."
리본핀이며 테디베어, 액세서리 등 워낙에 손으로 만드는 일들을 좋아하는 데다가 꽃을 하고 있어서인지 그런 얘기는 참 많이도 들어왔다. 사실 나도 내가 그토록 바랬던 것처럼 예쁘게 딸을 키우고 싶었었다.
"어머어머, 이것도 사람이 입는 거야? 인형 옷 아니야?"
이렇게 호들갑을 떨만한 귀여운 원피스에 벚꽃 닮은 스웨터를 입히고, 스타킹과 손바닥보다 작은 신발을 앙증맞은 발에 신기고, 머리엔 예쁘게 리본 핀도 꽂아주며 키우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두 아들을 키우면서는 딸이 아니어서 속상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엄마들이 아이들을 위해서는 오히려 동성의 자매나 형제가 더 낫다고 말하는 것처럼, 두 아들은 네 살 차이가 나지만 친구처럼 투닥거리면서도 서로를 끔찍이 챙기면서 자랐다. 다만, 사춘기를 지날 때는 말수가 부쩍 줄고, 까칠한 데다가 어찌나 무뚝뚝하던지 엄마인 내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기도 했고, 표현은 안 했지만 서운했던 적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아들들은 그렇게 차례로 사춘기라는 긴 터널 같은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꽤 긴 시간 동안 묵묵히 기다리자 저 멀리서 다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는 예전처럼 다정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주었다. 게다가, 덤으로 키가 부쩍 커진 만큼 마음의 깊이도 깊어졌는지 엄마를 위할 줄 도 알고 감쌀 줄도 아는 듬직함과 의젓함까지 함께 챙겨 나왔는데, 나는 그게 은근 참 좋았다.
며칠 전 큰 아들이 사진을 보내왔다. 그럴듯한 봉골레 파스타였다.
"엄마! 음식점에서 먹었던 맛은 아니지만 나름 완전 처음, 그것도 봉골레를 한 것 치고는 낫 배드! "
유학 생활 중인 큰아들은 라면 하나도 제 손으로 잘 끓여먹지 않던 남자 사람이었다. 엄마의 퇴근이 늦어져도 웬만하면 스스로 찾아서 먹는 법이 없었고, 엄마가 해 준 밥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 기다렸을 뿐이라고 넉살을 피우며 밥상이 차려지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런 아들의 유학생활은 안 봐도 뻔했다. 학기가 시작되면 살이 쪽 빠졌다. 살이 빠진 모습을 사진으로 볼 때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먼 곳에서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다 큰 아들이 안쓰러웠다. 먹고 싶은 건 많았을 테고, 매번 사 먹는 것도 마땅치는 않았을 거다. 때로는 챙겨 먹는 게 귀찮은 날도 있었을 테고, 아침 식사를 아침잠으로 대신하고 싶었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엄마의 마음을 늘 안타깝게 했었는데, 이번 학기부터는 운 좋게도 몇 명이서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주방이 달린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학기 시작 전에 아주 기본적인 주방 용품을 챙겨서 보냈었다. 과연 뭐나 해 먹을까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라면을 끓여 먹는 것으로 시작하더니 계란을 사다가 프라이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계란을 풀어 볶음밥을 하기도 하고 이렇게 봉골레 파스타에 성공했다며 사진을 보내온 거다.
어릴 때부터 큰 아들은 야채를 잘 먹지 않는 편식이 심했다. 좋아하지 않는 야채나 김치를 보이지 않게 밥 속에 숨겨서 주기도 하고,
"자, 비행기가 들어갑니다. 준비됐나요? 꼭꼭 다 먹어야 튼튼해져요! 슈웅- "
누구나 해보았을 숟가락 비행기 놀이나 기차놀이를 해가며 먹여 보기도 했다. 요리 방법을 바꿔도 보고, 모양을 내서 재미있게 먹을 수 있게도 해보았지만, 깔깔 웃으며 입에 넣었다가도 이내 싫은 야채만 골라내서 툭 하고 뱉어내기 일쑤였다. 편식 습관을 잡아보겠다고 달래도 보고, 혼도 내보고 심지어 배가 고프면 다 먹는다 하길래 한 끼를 굶겨서 먹여 보기도 했다. 그래도 그 습관은 고치기가 참 힘들었는데,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바깥에서 음식을 사 먹기도 하고, 또래들끼리 어울려 먹으면서 신기하게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어릴 땐 나도 미처 몰랐다. 지금 와서 보면 그렇게 동동거리며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될 일들을 마치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끝까지 고쳐보겠다며 오기를 부리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좋아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한데 그걸 몰라서 서로 마음에 흠집을 내며 속상해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난다. 가장 가까운 부모 말은 잘 듣지 않아도, 또래끼리 부딪치면서 혹은 부모를 떠나 홀로서기를 하면서 부모가 아무리 얘기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일들을 스스로 깨닫게 되면 시키지 않아도 하게 된다. 자아가 생기고 스스로 동기가 부여되고, 해야겠다는 결단이 서면 그때는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자신의 생각과 다짐으로 변화를 일으킨다.
아들 인생의 첫 요리, '봉골레 파스타'는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다.
'언제까지고 어린아이 일 것 같았는데,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걸까. 이러니 내가 나이가 들어가는 거겠지.'
시간은 예외없이 이제 나에게도 너무 빨리 흘러가고 있다. 정없이 따박따박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이제 정말 아들이 홀로서기를 제대로 시작하는구나' 하는 뿌듯함이 미묘하게 공존했다. 거기에 '이렇게 내 품을 조금씩 떠나가는 거겠지'라는 왠지 모를 서운함과 허전함도 그 미묘한 감정을 거들었다.
나와는 또 다른 시계추를 가지고 있을 아들이 하나씩 하나씩 자기 힘으로 인생이라는 퍼즐을 맞추어 가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어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며 더 나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묵묵히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가끔 부모로서 무척 안타까울 때도 있겠지만, 그 시간이 더디다 해도 스스로 해내는 모든 일에 그럼에도 나는 물개 박수를 치며 매 순간 기뻐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