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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f Dec 19. 2021

전역 이야기

마흔다섯 번째 수필

    5월 21일. 내가 처음 전입 온 날. 날 포함한 기상대의 8명 중 4명이 서울대였다.

    "그렇지. 내가 이러려고 공군 왔지."

    군생활은 이 한 문장을 철저히 부정하기 위한 1년 7개월이었다.



    군대는 핑계가 없는 장소였다. 무엇이든 정직하고, 합리적으로 결정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스스로를 속이기에는 변명의 선택지가 부족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난 여태 사회의 변명 속에 가려져있던 슬럼프를 정확히 목도할 수 있었다. 이유도, 해결방안도 부족한 이 공간 속 우울함을 다스릴 방법은 온연히 인정하는 것밖에 없었다.


    모든 깨달음은 "군생활은 쉽다."라는 오류에서 비롯되었다. 2학년 2학기는 대부분 4년제 대학생에겐 큰 터닝 포인트다. 고등학생 대하듯 친절했던 과목들이 점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하고, 동아리나 대외 활동을 하는 이에게는 자신의 활동의 정점을 찍을 때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랬다. "너네는 기니피그야. 실험용 쥐라는 거지."라고 조롱하는 교수 아래서 매뉴얼도 없는 실험을 하느라 버스가 끊길 때쯤, 사설 연습실로 향해야 했던 시절이 바로 19년도 가을이었다. 그렇게 해가 다시 나올 때쯤이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과방에 있는 새터 티, 과잠 등 헝겊을 덮고 복도에서 자면서 아침 수업을 기다렸었다. 물론, 연애도 했었고 말이다.

    새벽 내내 실험을 붙잡다, 느티나무 카페가 다시 여는 시간이 되어 주문한 '1번'의 아메리카노는 정말 씁쓸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와 내 동기들 사이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아, 군대 가고 싶다." 여자 친구가 있던 터라 진심 반 농담 반이었지만, 나 역시 조금 쉬고 싶었다. 단순히 제때 자고, 제때 먹고 싶었다.


    진주 훈련소에 있을 때만 해도, 군대가 쉽다는 오류는 깨지지 않았다. 399점이란 점수로 2 스타 상을 받을 때, 오만은 한창 격양됐었다. 돌이켜보면 사랑의 힘을 빌어 강박적으로 높은 점수에 집착한 결과였을 뿐인데 말이다. 당시 나는 미리 종합 평가의 시험 범위를 물어봐, 측신을 비롯한 가입단 주에는 편지지 뒤에 써서 외우고 다녔고, 소대 근무가 되고 나서는 형광봉으로 자체 연등을 실시했었다. 짧은 입시기간 동안만 잔뜩 긴장하고, 조금 더 신경 써서 얻은 보상을 '내가 군대 체질이어서'란 이유로 번역한 대가는 수원에서 혹독하게 치르게 되었다. 잠깐 딴 길로 새는 이야기지만, 난 훈련소 전체 1등에 특기학교 2등을 했었는데, 특기 학교 1등 상품 만년필이 훈련소 전체 1등 상품 2 스타 시계보다 이뻐서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도쿄 올림픽이 끝나고 김연경과 배구에 취해 몰아봤었던 배구 애니메이션 "하이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높은 점프는 언제나 제대로 된 도움닫기에서부터." 수원에 온 5월 21일. 처음에 조급하지 않았더라면, 더 건설적인 군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 난 급했다. 휴가에 급했고, 여자 친구와 연락에 목맸고, 자기 계발에 성급했다. 휴가는 뭐 어쩔 수 없었겠지만, 연애도 공부도 달성한 바를 이루지 못한 걸 보면 마냥 애니가 틀린 말은 아니구나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쉽게 좌절한 것은 아니다. 실패를 겪을 때마다 다시 도전하겠다는 강한 목적의식은 있었다. 그럼에도 끝내 실패한 것은 여유가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나'라는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정말 이루고 싶은 능동적 목표가 아닌, 나라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한다 여긴 수동적 숙제였다. 이 같은 결론까지 오기엔 참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또한, 군대가 아니었다면 난 이 실체적 진실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 자신한다. 사회는 언제나 변명과 탈출구가 가득한 곳이니 말이다.



    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을 때, 그 이유를 본인에서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실상 대게는 그렇지 않다. 시험이 어려워서, 내용이 지엽적이어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등 자신의 무능을 감추곤 한다. 또는 잠깐 덮어둔 채, 말하자면 탈출구로 도망가기도 한다. 다음 시험을 잘 보면 된다는 위안과 술자리 한 번으로 훌훌 우울을 털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의 방어기제 본능은 부상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야생에서 길러져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합리화와 도피는 훌륭한 대응 전략이지만 근본적인 결함을 발견하는 데서는 큰 약점을 가지고 있다.


    고백하자면, 지난 8월 난 처음으로 목매단 내 모습을 상상했다. 우울함과 무기력감이 늘고, 죽음 이후의 광경을 그리는 것이 익숙해질 때쯤 스스로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숨이 안 쉬어지는 것과 같은 공황 증상도 나타났다. 하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패닉 감각이었다. 대학에서부터 있었던 증상의 심화 버전이라고 느껴졌다. 군생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내 선임들은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었고, 간부들 역시 틀린 지적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부당하지만 '쉬운' 사회 군대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 느끼니 새삼 내 결함이 돋보였다. 아쉽게도 군대는 마땅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없었고, 결함의 존재가 주는 상실감과 좌절감은 난 여과 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혼자 견딜 자신이 없었던 나는 그렇게 상담을 시작했다. 


    눈치챘겠지만, 상담은 내 많은 깨달음의 촉매 역할을 해주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무근본의 자아 프레임을 깬 것도, 내가 통제와 주체성에 예민하다는 것도 모두 상담에서 던져진 화두였다. 상담관의 도움으로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었고, 군대는 새로운 관점을 시험하기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극히 가까운 개인 거리, 특유의 비합리성의 군대 속에서는 계급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이 피해자였다. 입지가 좁아지면서 예민해진 그들, 아니 우리 사이로는 많은 스파크가 튀었고 그것은 비단 인간관계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찌 됐든, 회사를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는 군대는 특히나 이벤트가 많은 공간이었다. 스트레스와 짜증으로 점철된 이벤트들이었지만, 그만큼 진심이었기에 그것들은 상담의 좋은 재료이자 나를 알아갈 수 있는 적당한 사례들이었다. 나를 바꿀 좋은 기회는 물론이고 말이다.

    4월의 내가 그린 전역모의 모습은 지금과는 정반대이다. 진작에 도화지는 찢겼다. 넓은 어깨로 꽃신을 고르며, 물리, 코딩, 영어 공부에 성공한 박진우는 없다. 어깨는커녕 다음 체력 검정 때문에 골머리가 아파 후임들에게 찡찡되고, 대학 후배에게는 여소해달라고 농담하고 있다. 공부에서도 라그랑지안, 해밀토니안도 모르는, 물리학과로서는 머저리에 가까운 인간이 되었다. 분명 나라는 인간은 종합적으로 왜소해졌다. 그렇지만, 훨씬 더 무거워졌다. 빈 껍데기가 이제는 가득 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전역 후 삶을 그리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관악에 갔는지를 직접 증명할 생각에 말이다.


    무릇 글쟁이라면 작문에 앞서 글을 관통할 키워드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나, 작대기가 채 차지 않은 시점부터 글쓰기를 기대한 꿈의 무대에서는 말이다. 글의 시작은 이렇게 해볼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줘야 할까 물어보지도 않는 고민을 하며 일병, 상병을 보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미복귀 휴가 결제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새벽 3시. SKC, 7 mile인 날씨지만 관측을 핑계 삼아, 옥상으로 올라간다. 풍경은 흔하기 그지없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과 별들, 그리고 이병 때부터 눈에 담아왔던 수원 활주로. 내 군생활의 키워드는 무엇이었을까.

    끝. 끝이다. 다양한 끝을 직시할 수 있었던 군생활이었다. 마지막의 끝인지, 아니면 최극단의 끝인지는 저마다 다르지만, 같은 단어 아래 놓인 의미들이기에 분명 인식적 유사성이 있을 것이다. 난 우울의 끝, 좌절의 끝이 무엇인지 목도했고 방황의 끝, 연애의 끝, 슬럼프의 끝을 경험했다. 삶의 끝 앞에서 난 비로소 강박에 끝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군생활이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수많은 끝으로 점철되었기에 값졌다 대답할 것이다.


    이 문단을 안 붙이는 것이 역시나 더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알고 있다. 글을 쓴 사람으로서 자신이 찾은 진주가 얼마나 반짝이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그니깐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면...


    남들은 몰라도, 나에게 군생활은 버리는 2년이 아니었다. 정신승리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언제나 범하는 실수이지만, 군대를 오지 않았다면 내 삶은 좀 뻔했을 것 같다. 글 쓰는 취미도, 창업도 내 삶의 궤도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특유의 비합리성과 제약된 자유는 내 자취의 새로운 선택지를 해금하는 요소였다. 

    나는 몰입을 통해서 '결여가 가득한 사회'를 '새로운 가치관의 나라'로 바꾸었다. 그렇기에 난 변화를 꾀할 수 있었다. '곧 나갈 공간, 내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은 공간'같은 저자세로 군대를 인식하면 군대는 납득하지 못할 재앙만이 가득한 공간이다. 분명히 이 사회도 핵심 가치관이 있다. 질서와 계급, 강한 군사력처럼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을 그저 부조리로 치부하면 몸 안에 화만 는다.

    순응하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날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얼마나 군대에 반하는 짓거리만 골라 해댔는지를 알 것이다. 그저 치열하게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시스템이든 일이든 말이다. 결국, 새로운 건 언제나 소중한 법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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