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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f Feb 24. 2023

염오(厭惡)의 자세라

책「성난 물소 놓아주기」의 파편

"고통이 윤회의 구조 속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찰할 때 당신의 반응은 변한다. 그것은 당신이 썩은 사과를 받고 나서 썩지 않은 부분을 먹기 위해 썩은 부분을 도려내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사과 전체가 썩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당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염오다. (책 "성난 물소 놓아주기" 23p, 아잔 브라흐마)"



    고통이 윤회의 구조 속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쁨은 곧 고통의 다른 모습이라 브라흐마는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고통이 기쁨의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왜 기쁨을 비롯한 세상의 자극을 반기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염오의 자세로 맞이해야 하는 걸까. 그것이 사실은 고통의 전조이자 무상한 것이어서?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책 덕분에 나 역시 우주의 먼지이며 시간축 위에 자유롭지 못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애닳으며 좌절하고 슬퍼하던 주제들에 있어서도 꽤나 달관.... 까진 아니어도 마음고생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태어나면 아픈 게 당연하다는 이유로 의사를 찾아뵈면 "선생님 큰일 났어요, 제 몸에 이상한 증상이 생겼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선생님, 이제야 제 몸이 정상적으로 아파요."라고 말해야 한다 주장하는 책의 초반부처럼,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세상에 미혹하여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다. 이는 맛있는 사과를 들 때마다 '썩은 것과 진배없으니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말자.'의 자세보다 썩은 사과가 손아귀에 떨어져도 '고통과 행복은 윤회의 구조 속에서 필연적인 것이며, 곧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자세가 어찌 됐든 더 행복한 것 같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이라 하면 일상적이고 다분히 평균(average)적인 기준으로 말이다.


    어디서 들었던 말이다.

"사람은 모두 당장 내일이라도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실을 은근슬쩍 카펫 밑으로 쓱 쓸어 넘긴 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내일을 살아간다."

    내가 참 좋아하는 말이다. "카펫 밑으로..."는 우리말로 (뭔가) "아 몰라, 했다 치고(웃음)"의 느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허무함, 부질없음은 마땅히 카펫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이 먼지들을 어서 카펫 밑으로 넣어놔야 한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는 이유로 깨끗함을 포기할 순 없다. 방이 난장판이 되더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난 내 한 번뿐인 인생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다. 치우는 것이 바보 같을지언정 적당히 치우고 적당히 더럽히며 살고 싶다. 이는 내가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뭐, 붓다의 가르침은 그냥 방 치우는 데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라 정도로만 받아들여야겠다. 내 방이 깨끗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카펫을 보며 키득거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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