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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멍이 그리운 날, 소설 한 권이 불러낸 춘천 여행

by 포도송이 x 인자


물멍 하고 싶은 날이 있다. 생각이 복잡할 때,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잘하고 있음에도 불안할 때, 내 안의 슬픔을 왈칵 쏟아내고 싶을 때다.


고등학생 시절, 성적은 내 감정의 그래프를 쥐락펴락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점수가 오르지 않던 날이면 울 곳이 필요했다. 내가 찾은 비밀 장소는 뒷집 앞마당의 작은 연못이었다. 창문에 기대어 바라보며 울다 보면, 연못 수위가 내 눈물만큼 조금은 차오른 듯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좌절과 슬픔을 물에게 맡기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면서 물멍의 사이즈도 커졌다. 연못은 호수가 되었고, 강이 되었다. 물멍을 하게 되는 이유도 달라졌다. 석차 등급의 하락 같은 눈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짊어진 삶의 무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찾게 되는 호반의 도시 춘천은 내게 그런 물멍의 도시였다.


얼마 전, 물멍을 하던 그 도시를 떠오르게 한 소설을 읽었다. 문하연 작가의 『소풍을 빌려드립니다』(알파미디어)다. 책장을 덮고 홀린 듯, 실제로 춘천을 찾았다. 책이 내 여행의 핑곗거리가 된 것은 처음이었다.


춘하시=춘천, 책이 만든 여행


소설 속 배경은 ‘춘하시’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춘천을 떠올렸다. 단지 '춘'이라는 언어의 단서 때문만은 아니다. 작품 속 묘사된 호수와 물안개는 내 기억 속의 춘천의 풍광과 너무도 겹쳐졌다. 소양호의 물결,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 봉곳 솟아오르는 산봉우리마다 걸려있는 안개들, 낯선 도시에서 온 이방인을 매료시키기에 춘천만 한 도시가 없었다.


결국 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9월 중순 흐린 날 춘천으로 향했다. 호수 앞 카페 2층 테라스에 앉아 소설 속 인물들을 떠올렸다. 내게는 상상의 시간이었다. 반대편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소설 속 장면과 겹쳐지자, 현실의 풍경이 소설 속 공간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마치 내가 주인공 연재가 되어 책 속의 공간을 실제 거닐며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옆 테이블의 남자가 힐끔 쳐다봤다. 그의 눈에는 상상의 시간이 아니라, 혼자 드라마 찍는 듯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연재가 물의 도시, 호수의 도시인 '춘하시'를 고른 건 예술과 풍경 때문이다. 춘하는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도시기도 하고 이런 풍경을 매일 보고 산다면 힐링은 기본이고 작가 아닌 연재도 뭔가 그럴싸한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치기마저 생겼다. (p. 11)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인 곳, ‘소풍’


주인공 연재는 서울 아파트를 팔아 호숫가 펜션을 사고, 복합문화공간 ‘소풍’을 연다. 사실 이 부분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요즘 같은 집값 시대에 서울 아파트를 판다고?" 연재가 내 친구였다면 등짝스매싱을 날렸을 것이다. 얼핏 보면 낭만적인 중년 여성의 도전 같지만, 그 이면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무모해 보이는 선택이지만, 그녀에게는 반드시 서울을 떠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소풍’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여자친구의 자실 이후 삶이 무너진 청년 현이, 제자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요가 강사 제하, 평범한 아기 엄마의 모습으로 퀼트 모임을 이끄는 혜진, 통기타로 버티는 싱어송라이터 수찬, 그리고 목공소의 강훈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모두 제각각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들의 상처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곪아있었다. '소풍'에서 만난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상처를 내보이며 더 깊은 관계로 엮이게 된다. 연재와 현이, 현이와 제하, 연재와 혜진의 관계가 그러하다.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다. 실제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군가를 구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한다. 그 양가성 속에서 더 강한 연대를 형성하게 된다.


연재에게 현은 나눠 든 짐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다. 현에게 제하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린 누군가에게 동아줄이 되기도 하고, 짐이 되기도 하는 복합적인 존재인 것 같다고 연재가 말했다. (p.228)


힐링과 웃음이 보물찾기처럼 숨어있다.


『소풍을 빌려드립니다』는 흔히 말하는 ‘힐링 소설’이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위로를 받게 된다. 이 책을 추천한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결을 지닌 소설이다. 작품 속 인물들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은 거창하지 않다. 그저 서로의 빈자리를 메워주며,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해낸다. 상대방이 스스로 회복할 때까지 곁에 있으면서 기다려준다.

작품 속 현이는 말했다.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때는 고립되었다고 느꼈을 때라고, 모두들 앞으로 나가가는데 혼자 섬에 갇힌 거 같았을 때라고(p166).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낼 힘이 생긴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다.


이 소설의 진짜 매력은 따뜻함만이 아니다. 문하연 작가의 전작 『명랑한 중년, 웃긴데 왜 찡하지?』에서 이미 확인된 그녀 특유의 유머와 넉살이 소설 곳곳에 숨어 있다. 독자가 그 보물 같은 웃음 장면을 발견하는 순간은, 마치 ‘소풍의 하이라이트인 보물찾기’ 같았다. 슬픔에서 웃음으로, 웃음에서 슬픔으로 능수능란하게 연결시키는 작가의 문장이 압도적이다.


“그날은 천사가 외로움 한 대야를 옮기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 쏟아버렸는지 춘하시엔 잠 못 드는 영혼들이 많았다.”(p.101)


왜 '소풍'일까


마지막으로 책을 덮고 나면 제목이 주는 잔상이 꽤 오래 머문다. 왜 하필 ‘소풍’일까? 소풍(逍風)을 한자로 풀이하면 ‘바람을 거닐다’는 뜻이다. 치열한 일상에서 잠시 쉬어가는 바람, 영원히가 아니라 하루만 허락된 자유가 소풍 속에는 내포되어 있다. 가난하고 고단했던 삶을 살았던 천상병 시인에게도 이승의 삶은 아름다운 소풍이었다. 소풍은 소설 속 연재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즐거운 한때를 품고 있는 인생의 은유이다.


책장을 덮으니 빗줄기는 더 세차 졌다. 학교 다닐 때는 소풍날 비가 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는데, 주인공들의 쏟아지는 슬픔을 받아 내기에는 오늘 같은 비가 오히려 어울렸다.(실제로는 빗속에 운전할 생각에 약간의 한숨과 지난달 갱신한 운전자 보험 약관을 떠올리기도 했다)

물안개 속에 갇힌 주인공들의 슬픔이 비바람이 불 때마다 출렁거린다. 오늘은 슬픔을 토해냈으니, 내일은 좀 더 가벼웠으면 한다.

연재도, 현이도, 혜진도, 작품 속 등장인물 모두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다음 물멍을 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들의 생이, 우리 모두의 생이 아름답고 빛나는 소풍이었으면 좋겠다.


연재의 새 출발을 응원하는 비가 불꽃이 되고 빗소리는 박수 소리로 연재의 세상에 울려 퍼졌다. 쏟아지는 우렁찬 쇼가 끝날 때까지 연재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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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 연재 대신 '대출하는 사람입니다' 매거진에 글을 발행합니다.

그저 책 소개가 아닌, 마음을 담은 서평은 처음 써봅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종종 의미있는 서평에도 도전해 볼까 합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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