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용 명함을 만들었다고?!

직장인에서 창작자로, 내 그림으로 인사하기

by 강마레

"안녕하세요, 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요~"


연극 포스터에 그림을 그리고, 잡지 일러스트도 그리고, 연극 대본도 쓰다 보니 최근엔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일이 많아졌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명함을 주고받게 되는데, 내가 건넬 수 있는 건 회사 명함뿐이었다. 딱딱한 회사 로고가 박힌 근엄한 명함을 내밀며 말한다.


“아, 이건 회사 명함이고요… 사실 그림 그리는 사람이에요"


또 시작이다. 회사 명함을 내밀며 어색하게 웃는 나와, 당황한 표정으로 명함을 받는 상대. 이 어색한 순간이 반복될 때마다 생각했다.


나를 제대로 소개할 수 있는 명함을 만들어볼까?


회사 명함엔 나의 그림도, 나의 부캐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다. 심지어 원치 않게 회사 정보나 담당 업무를 공유하게 되니 더더욱 불편했다. 몇 번의 민망함을 겪고 나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나’로 인사할 수 있는 명함이 필요하겠구나.


시작은 청첩장이었다


사실 ‘내 그림으로 인사한다’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다.


10여 년 전, 결혼을 앞두고 유명 청첩장 브랜드 샘플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누군가에게 이미 받은 것 같고, 또 누군가 곧 줄 것 같아.’


그래서 그리기로 했다. 수채화용지에 색연필로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처음 만난 제주올레길의 장면도 넣었다. 파란색과 오렌지색 리본, 제주 지도, 올레 화살표… 그림들이 모여 우리만의 청첩장이 완성됐다.


물론 인쇄는 쉽지 않았다. A업체는 외부 디자인을 받지 않는다고 했고, 소규모 업체를 수소문해 제작했다. 번거로웠지만 내 그림으로 인사한다는 것, 그 자체가 좋았다.


그 뒤로 몇 해가 지나, 아이패드와 프로크리에이트 덕분에 후배의 청첩장은 훨씬 수월하게 작업했다. 그 경험이 그림을

담은 개인 명함도 만들어볼 수 있겠다는 마음을 먹게 했을 것이다.


나답게 표현해 보자


결심은 섰다. 그런데 막상 만들려니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디자인? 그래도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어느 정도는 신경 써야 하지 않겠어? 기억나는 명함을 되짚어봤다.


예전에 한 미술 전시장에서 만난 김미아 작가의 명함이 떠올랐다. 명함 한쪽에 작가의 대표 그림이 들어 있었는데, 마치 손바닥 위에 작은 작품 같았다.


또 제주 이중섭 거리의 카페 ‘메이비’를 운영하는 친구 H의 명함도 인상 깊었다. 정형화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크래프트지에 손그림이 그려진 명함은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그림 선택의 딜레마


어떤 그림을 넣지? 이 고민만 세 달쯤 했다.


처음엔 내 대표작이라고 우기는 라라랜드의 포스터를 넣으려 했다. 하지만 초보 시절 그림이라 비율이 어색했고, 인물화는 지인들이라 내 명함에 쓰기엔 곤란했다.


자화상을 넣으면 해결되겠지만, 아직 자화상을 그리지 못했다. 개와 고양이 그림은 있었지만, 어느 쪽을 택하든 상대 진영의 원성을 살 게 뻔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문득 떠오른 게 바로 기린이었다. 왜 기린인지 설명은 어려웠지만, 확신만은 분명했다.


아마 기린을 그렸던 시절이 가장 즐겁게 그림을 그리던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 퇴근하고 나서 아무 생각 없이 붓을 잡고, 기린의 긴 목을 따라 선을 긋던 그날. 그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순수한 감정이 참 좋았다.


그림이 결정이 나자,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회사 명함 vs 개인 명함


아이러니하게도 회사 명함은 정말 바꾸기 어렵다. 실무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경영 목표를 넣을까요?”
“브랜드 디자인 가이드 위배 아닌가요?”
“직원 전체 투표는요?”


반면 개인 명함은 간단하다. 온라인 디자인 툴에 접속해 가로세로 옵션을 선택하고, 내가 그린 기린 그림과 그림 정보를 넣고, 이름과 연락처, 브런치 QR코드를 배치했다. 가능한 심플하게, 단 하나 이름만 다른 폰트에 색으로 강조했다.


내 부캐이자 필명 강마레에는 ‘강에서 바다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강처럼 맑고, 바다처럼 깊은 색으로 표현했다. 웹 사이트에서 최종 시안을 PDF 형태로 확인한 뒤 최종 컨펌을 하고 인쇄소에 넘겼다.


만드는 과정에 이런저런 사소한 고민들이 끼어들기도 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망하면 어때,
내 명함인데
다시 찍으면 되지.

이게 개인 명함의 묘미다. 안 되면 또 만들면 된다.

드디어 명함이 도착했다


설렘 반, 걱정 반의 시간이 지나고 며칠 후 명함이 도착했다. 모니터에서 본 색보다 인쇄된 색은 살짝 어두웠고, 절단선 때문에 그림의 가장자리가 조금 잘려나갔다. RGB와 CMYK의 차이, 도련 처리 등 이론으로만 알던 것들을 체험했다.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괜찮았다. 내 그림이 담긴, 나만의 첫 명함이니까.


다음 명함은 어떤 모습일까?


200장을 다 쓰기까지 몇 달쯤 걸릴까? 아니면 몇 년? 모르지만 벌써 새 명함을 만들고 싶어진다. 절단선을 좀 더 고려하고, 색도 조정하고, 다른 그림도 넣어서.


그러다 문득, 지난 여정을 돌아보게 됐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나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그리고 다시 나를 위해서.


내 그림이 일상의 순간들을
채워가고 있다는 사실이
난 여전히 신기하다.


이제는 꽤나 당당하게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것 같다.


저는 그림 그리는 강마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