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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유안 Sep 20. 2024

띄어 넘기에는 존중이 없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 빠르게 중요한 말만 찾고 싶은 욕심. 나는 글에서 핵심만 찾아낼 수 있다는 자만심.


    이 세 가지를 다 갖춘 사람이 되면 문장을 띄어 넘으며 읽는 습관이 생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삼십 대 중반이 된 지금 이 습관의 시작을 거슬러 기억해 올라가다 보면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고등학교 3학년 영어수업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 나라는 사람의 존재 이유는 공부밖에 없다는 듯이 매일매일 공부만 하며 살았다. 딱히 어떤 대학과 전공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웠고, 그 두려움을 원동력 삼아 공부에만 매진했던 시기였다.


    내가 제일 잘했던 과목은 영어였다. 30명이 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인화된 수업을 할 수는 없기에, 학교 선생님들의 영어 수업 내용 중 9할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에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쓰고 싶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내가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진도를 나갈 때면 친구가 발표를 하든, 선생님이 설명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나는 다른 과목 문제를 풀었다. 그러다가 슬쩍 들었을 때 내가 틀렸던 문제나 몰랐던 내용에 대해 진도가 나가고 있으면 다시 고개를 들고 선생님의 수업에 집중했다.


    나는 선생님이 이런 나의 공부습관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그냥 선생님이 무엇이라 생각하든 관심이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듯싶다. 어느 날 그 젊은 여자 영어 선생님은 수업 도중 뒷자리에 앉아있던 나에게 다가와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 것인지, 왜 수업을 띄엄띄엄 듣는 것인지 물으셨다. 그때 내가 느끼기엔 선생님은 전혀 화가 나보이 시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당당하게 설명을 했다.


“수업 내용 중에 모르는 내용에는 미리 형광펜을 쳐놓고, 진도 나가는 부분이 형광펜이 처지지 않은 부분이면 어차피 수업을 들어도 배울 게 없으니 그 시간엔 다른 걸 공부하고요. 형광펜이 쳐져있는 부분이면 제가 모르는 부분이니까 그 부분만 들어요!”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시더니, 그저 끄덕이시며 “그래, 넌 참 효율적인 아이구나”라고 말씀하시고는 그 뒤로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으시고 다시 돌아가 수업을 하셨다. 그 당시에는 그냥 이렇게 효율적인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아껴 쓸 수 있으니까, 나는 무엇이 나에게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은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돌이켜보니, 그때 나의 그런 행동에는 오로지 나만 존재했다. 거기에는 선생님에 대한 생각도, 나와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때 나에게 학교와 수업이라는 것은 내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해야 할 공부를 하는 공간과 그에 필요한 지식 전달의 시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선생님과 나와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서로 소통하는 관계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내가 지식을 얻는 관계로 설정했고 선생님을 지식전달자의 역할로 한정지 었다. 마치 퀘스트를 깨야 하는 게임의 스테이지에 존재하는 npc처럼.


  선생님이 그날 기분이 상하셨을지 안 상하셨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제 그때 그 시절의 내가 부끄럽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나에게도 좀 더 깊은 관계를 맺는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을까? 참 효율적인 아이라는 말이, 칭찬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효율을 위해 띄어 넘는 습관은 지금 내 삶에도 불쑥불쑥 발견된다.


    지금도 책을 읽을 때 집중하지 않으면 습관처럼 오른쪽에 남은 글자가 많지만 눈동자가 아래줄로 향한다.

'뒤에 글자들은 안 읽어도 큰 이야기를 이해하기엔 무리가 없어 - 빨리 다음줄로 넘어가자.' 새로운 회사에서 새로운 동료들을 만날 때에도 사람 한 명 한 명 천천히 알아가는 과정을 뛰어넘고, MBTI를 쉽게 물어보며 그 사람을 빨리 파악해 버렸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은 ST 라 직설적으로 말해도 괜찮고, 저 사람은 NF 니까 말을 따뜻하게 해 줘야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 말이다. 이런 띄어 넘기는 안 그래도 내 중심으로 흘러가는 내 인생에서 더더욱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책이라는 것은 작가가 여러 번을 탈고하며 쓴 것이고,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 줄 한 줄 고심해서 쓴 것일 테다. 그저 작가가 하고 싶은 말만 알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풀어쓴 문장들을 한 줄 한 줄 정독하는 것이 작가와 책에 대한 존중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같이 일을 하며 그 사람들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고 정을 쌓아가는 것이 그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다.


    나의 편리함을 위해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띄어 넘으며 살고 있다. 나조차도 이렇게 마구잡이로 띄어 넘으며 존중 없이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존중하지 않는 때가 와도 내가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까?

    

    무언가 띄어 넘고 싶을 때는 한 번만 참아보자. 다음 문장, 문단으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한 번만 참고 읽던 곳에서 마무리를 잘해보자. 어렵다면 입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면 도움이 된다. 처음 알게 된 사람에게 MBTI를 물어보고 싶을 땐 한 번만 참아보자. 대신에 쉴 때는 무얼 하며 보내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천천한 호기심으로 다가가보자.


느리지만, 존중이 가득한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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