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중국 지사장은 무얼 해야 하는가
중국 지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총경리와 경리의 근속연수가 너무 짧았다는 것이다.
윤경리도 들어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전임 총경리는 2년 만에 퇴임했다고 했다. 아버지와 기획실장님에게 확인해 보니 그 전의 총경리, 경리들도 2년 남짓의 짧은 기간만 근무했다고. 이런 구조에서는 경영과 업무의 연속성이나 장기적 계획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왜 다들 이렇게 짧게 근무했을까요?"
기획실장님과 윤경리에게 물어보니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중국 지사의 설립과 총경리 선임부터 근본적인 문제의 시작. 이 중국 지사는 본사가 직접 설립해서 개척한 것이 아니라 기존 회사를 인수한 것이었다. 그리고 치밀한 계획 하에 전문경영인을 중국 지사장 겸 총경리로 선임한 게 아니라, 아버지의 지인들 중에 조건과 상황이 맞는 사람들을 부임시켜 왔다는 것이다. 고무 사업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본사 사장 지인 어르신들이 총경리를 맡으니, 일반적인 관리와 대표자 역할만 수행할 뿐. 대부분의 총경리들은 적당히 직장생활 말년의 연장 정도로만 여기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아버지는 권한을 총경리에게 위임해 놓고 특별히 관리를 하지 않으셨고, 본사 직원들은 사장님 지인인 총경리에게 업무 지시나 요청을 하기 힘들어했다.
열정과 능력이 없는 총경리가 있다 보니 실무를 하는 경리가 힘들어졌다. 고무 사업에 대한 실무적인 도움을 받기는 어렵고, 이것저것 챙기고 모셔야 하는 어르신만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총경리와 경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능력 없는 총경리 밑에서 경리가 오래 버티지 못해 퇴사하게 되고, 당연히 중국 지사의 실적이 좋지 않으니 본사에서도 총경리에 대한 신뢰가 흔들려서 총경리를 교체하고. 하지만 능력 있는 총경리의 부임과 본사의 세심한 지원이 이어지지 않으니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중국 지사는 본사의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 실은, 그렇게 만들고 방치했다.
기획실장님도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특별한 방법을 찾지 못하셨다고 했다. 본사 임직원들은 본업에 바빠서 중국 지사를 챙기기 어렵다 보니 발전을 위한 지원보다는 문제가 생기지 않게 감시하는 역할만 간신히 했다. 그러다 보니 중국 지사가 하려는 활동, 특히 지출이 들어가는 부분에 대해서만 통제를 하는 걸로 보였다.
중국 지사 경리 입장에서는 본사가 도와주는 건 없고, 뭐 좀 해보려면 간섭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중국 지사를 실질적으로 경영하는 경리는 이러한 악조건 하에서 지쳐갔고, 결국 금방 퇴사하게 되는 것이었다. 윤경리도 실은 퇴사 의사를 밝혔는데 본사에서 새로운 제대로 된 총경리가 부임할테니 기다려보라면서 만류했다고.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내가 할 역할이 명확해졌다.
1. 고무 사업 실무 및 경영활동에 실질적 기여
2. 경리 손 안 벌리고 독립적으로 생활
3. 본사의 입장과 중국 지사의 현실을 조율
1번과 2번은 당장 하기 어려웠고 윤경리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3번은 바로 실행할 수 있었다.
본사의 답답함과 의구심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가 부임함으로써 적어도 의구심은 불식됐다. 내 능력과는 별개로(...).
본사에서 나를 안 믿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중국 지사에 대한 전권을 가진 것도 이전의 총경리들과는 다른 부분. 그리고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 전담. 초기에는 작은 이슈들도 다 현황과 계획을 아버지와 기획실장님에게 보고했다.
"○○ 설비 점검 완료했습니다."
"△△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구매처 발굴 중입니다."
"□□ 고객사 업무방식 변경에 따른 대응 계획입니다."
사소한 것까지 다 보고하니 본사에서도 중국 지사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적어도 이전보다는 보고가 세세하게 들어오는구나, 정이사가 열심히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은 받았을 터.
의외의 소득은 윤경리도 본사 보고에 대한 부담을 덜었다는 것이었다. 전에는 일도 하고, 총경리에게 보고도 하고, 본사에도 보고하고, 그 과정에서 총경리와 본사 의견이 다르면 중간에서 골치 아팠는데, 이제는 나에게만 보고하면 되니 편해졌다고 했다.
"총경리님에게만 보고하면 되니 정말 편해졌어요. 보고 업무가 절반으로 줄었어요."
고무 사업 실무에는 아직 크게 기여하는 게 없었지만, 윤경리의 다른 본사 보고 업무 부담은 덜어줄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나고부터는 월간 보고자료도 내가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자료를 직접 만드는 게 숫자와 내용을 익히는 좋은 방법이니까.
아직 고무 사업의 총경리 역할은 멀었지만, 중국 지사를 대표하는 지사장 역할에 대해서는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대기업에 다닐 때 회사의 R&D 의사결정체계를 운영하는 일을 했었는데, 주요 업무는 사내 조직 간 상하좌우 여러 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작은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하구나.
본사와 중국 지사 사이의 가교 역할. 그리고 실무자의 우산 역할. 이것부터 충실히 해보자. 나머지는 천천히 배워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