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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한국 출장을 가면 눈치가 보인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by 다비드

중국 지사에 부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2015년 8월 초, 첫 한국 출장을 가게 됐다. 매월 첫 주에 본사에서 열리는 월간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주요 명분이었고, 본사에서 추진 중인 중국 사업에 대해 협의하는 것이 실무적 목적이었다. 하지만 아직 중국 사업 관련해서 명확한 역할이 없다 보니, 특별히 한국 출장에서 본사 직원들과 협업할 일은 거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본사와 수도권사무소에 얼굴 도장 찍으러 가는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월간부부 생활을 시작한 아내를 만나는 것이 더 큰 의미였다. 아내는 내가 뭘 하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짧은 일정으로 본사와 수도권사무소를 다녀오고 곧장 출국하니 "뭔가 바쁘게 사는구나" 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보통 한국 출장 일정은 이랬다. 본사 월간회의가 있는 첫 주 월요일을 기준으로, 그 전주 금요일 퇴근 후 상하이 공항으로 가서 밤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집에서 아내와 주말을 보내고 일요일 오후에 광양으로 이동. 월요일에 본사에 출근하고 퇴근 후 저녁에 서울로 이동. 화요일에 수도권사무소에 출근하고 퇴근. 수요일에 비행기로 상하이에 도착해서 지사로 이동. 가능하면 퇴근 이후 저녁 시간에 이동을 했고 사무실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어도.

꽤 오랜 기간 동안 이런 일정으로 한국 출장을 다녔는데, 직원들에게 농땡이 부리는 이미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빡빡한 일정으로 계획했다. 그리고 내 본진은 중국 지사이니 최대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달까.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당시에는 회사에서 내 자리나 역할도 불투명한데 근태라도 잘 챙기자는 생각. 아내는 뭐 그렇게까지 눈치를 보냐 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Gemini_Generated_Image_a8xdzha8xdzha8xd.png 하는 게 없으니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본사 출장에서 주요 업무는 기획실장님과 해외사업팀장님에게 메일이나 전화로 보고하고 협의하던 사항들을 대면해서 논의하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비대면 업무협의가 보편화됐지만, 2015년에는 대면하기 전까지 협의사항들을 가지고 있다가 대면해서 공유하고 협의하는 문화가 많이 남아있었다.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인데, 당시에는 덕분에 본사 출장의 의미가 있었다.

"중국 지사 현황은 어때요?"
"고무 사업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중국 사업 관련하여 요청한 사항은 이렇게 진행 중입니다."
"그래요, 수고 많으세요."

대화 내용도 그리 깊이 있지는 않았다. 아직 내가 보고할 만한 특별한 성과나 계획이 없었으니까.

서울사무소에는 해외사업 관련 조직이 없어서 그야말로 협업할 업무가 없었다. 그냥 임원분들, 직원들과 인사하고 점심 먹고 얼굴 도장만 찍는 느낌이었다.

"정이사님, 중국 생활은 어떠세요?"
"네,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재미있어요."

이런 식의 안부 인사가 전부였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내 본진이나 다름없는 곳인데 역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 내 역할, 내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초조함은 있었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참신하거나 도전적인 뭔가를 할 능력과 의지는 없던 시기였다.

465573020_9619673868047584_1666473111818407475_n.jpg 어서 중국으로 도망치자(...)

매월 초 한국 출장은 아내와 시간을 보내는 힐링인 동시에, 본사에서 내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을 가져오는 시간이었다. 주말에 아내와 함께 있을 때는 '역시 집이 최고야' 하는 마음이었다. 중국에서의 외로움과 막막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본사와 서울사무소를 다니면서는 항상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다른 임원들은 각자 명확한 역할과 책임이 있는데, 나는 그냥 중국에 있다가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러 오는 사람 같았다. 비행기에서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항상 복잡한 기분이었다. 아내와 헤어지는 아쉬움, 중국에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여전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 뒤섞여 있었다.

'다음 달에는 뭔가 보고할 만한 일을 만들어야지.'

매번 이런 다짐을 하며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막상 중국 지사에 도착하면 또 일상에 묻혀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첫 한국 출장이 끝났고, 이런 패턴이 한동안 계속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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