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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남이 Jul 27. 2020

엄마랑 열무

어떤 여름날 풍경

느지막이 일어났는데 부엌이 부산하다. 아침 일찍 엄마 아빠는 농수산물시장에 다녀왔다. 입으로는 온갖 투정을 부리면서도 손은 바지런히 옥수수 껍질을 벗기는 아빠와 갓 쪄낸 김 나는 옥수수를 쟁반에 옮겨 맛을 보는 엄마가 보인다. 나는 식탁 위 분홍색 복숭아 박스에서 잘 익은 딱딱 복숭아를 하나 꺼내 야무지게 베어 먹는다. 창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옥수수의 구수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다. 다 먹은 복숭아와 자두 씨가 식탁에 널브러져 있고 옥수수 찌는 압력솥의 소리가 경쾌하다. 여러모로 궁합이 좋은 여름의 아침 풍경이다.



옥수수가 정리되자 엄마는 콩 다발을 내어 놓는다. 이제 막 옥수수를 정리한 아빠 앞에 콩이 다시 놓였다. 아빠는 여전히 투정을 부리지만 껍질 벗기기에 이미 착수했다. 콩껍질 안에 엄지손톱만 한 콩이 3~5개 정도 들어있다. 베이지색 바탕에 갈색 무늬가 듬성듬성 있는 이 콩은 호랑이 무늬와 닮았다고 호랑이 콩이라고 불린단다. 엄마는 밥에 항상 콩을 넣는다. 이번 달엔 호랑이 콩이다. 호랑이 콩 두 바구니가 금세 채워졌다. 콩이 정리되자마자 열무가 등장한다. 여름엔 열무김치지.  



옥수수 두 푸대, 호랑이 콩 한 푸대, 열무 한 박스, 복숭아 한 박스, 자두 한 박스, 각종 채소들. 오늘 엄마가 데려온 여름들.



열무 다듬기는 엄마의 몫이다. 바닥에 방수포를 깔고 작은 의자를 하나 가져와 자리를 잡는다. 박스 안의 열무를 집어 제일 아래 이파리 부분은 뜯어내고 윗동을 잘라 한 뭉치였던 열무를 두두둑 털면서 양푼에 넣는다. 엄마에게 유투버처럼 열무김치 만드는 법을 설명해 달라고 했더니 소금에 절인 다음 양념에 무치면 된다고 말한다. 그게 뭐냐고 했더니 그게 다란다. 비법을 알려줘야지 라고 했더니 손맛이 비법이란다. 이번 열무는 부드러워 좋다고 말한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했더니 그냥 딱 부드럽게 생긴 게 있다고 한다. 이런 부드러운 열무가 4,000원이라니 아주 거저라며 농민들이 이래서 참 힘들단다. 열무가 딱딱(?)하면 소금에 절일 때 열무를 좀 주물러주면 좋단다. 그런 건 어떻게 알게 됐느냐고 스스로 터득한 거냐고 물으니 유튜브에서 봤단다. 열무 잎에 벌레 먹은 흔적이 있는게 좋은 거란다. 너무 깨끗하면 약을 많이 친 거라고. 오래전 아주 매끈한 열무를 다섯 단이나 사서 김치를 담갔는데 약품 맛이 나서 다 버린 적이 있단다. 다섯 단을 다듬는데 얼마나 힘들었겠냐며 그때 이후로 엄마는 깨끗한 열무는 사지 않는 단다. 엄마는 올해 열무 김치를 7번 만들어서 그중 두 번은 엄마의 언니와 오빠에게 가져다주었다. 엄마는 선물로 김치를 보낸다. 엄마의 마음은 김치로 전달된다.  



동영상 녹화버튼을 눌러놓고 옆에 엎드려 누워 엄마에게 계속 말을 건다. 엄마의 열무 이론부터 첫 내 집 입성과 그때 큰 맘먹고 장만한 오븐 이야기, 집들이에서 돼지갈비를 대접했는데 소고기로 알고 먹은 사람에게 굳이 돼지라고 말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양푼에 열무가 가득 차는 동안 이야기도 쌓였다. 엄마는 좋은 대화 친구다. 내 질문을 귀찮아하지 않고 하나하나 대꾸해준다. 그러다 곤란한 질문이 나오면 귀여운 엄마는 싫은 내색 보단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말한다. 엄마를 곤란하게 하는 질문은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물을 때다. 엄마는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서툴다. 

엄마는 어느새 열무를 소금에 절여놓고 비빔 당면을 만들어낸다. 오늘 여름에 딱 어울리는 점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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