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있기
나의 2020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2년째 이어오는 글쓰기 모임 멤버들과 온라인 연말 모임을 가졌다. 한 멤버가 물었다.
"나의 2020년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질문을 받자마자 올 한 해가 머릿속을 스쳐간다. 한참을 생각하던 중 적절한 단어가 떠올랐다. '가만있기'
올해 나는 거의 멈춰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곳저곳 다니며 배우고 경험하기 좋아하는 나의 활동에 큰 제동이 걸렸다. 올해 많은 사람들의 거의 모든 이유는 코로나 때문이거나 코로나 덕분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최근 4~5년 동안 참 부산스럽게 살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을 하면서도 저녁에는 또 아쉬운 마음에 쉽게 잠을 자지 못하니 하루가 늘 피곤했다. 독서토론을 하면서부터는 늘 책을 옆에 끼고 살았다.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워 지속한 일이기는 하지만 관성적으로 의무감을 느끼며 참여한 시간도 짧지 않았다. 또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성장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을 자주 만났는데 멋진 친구들의 성장만큼 나도 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기운이 빠지는 날도 적지 않았지만 함께 있을 때 받는 에너지가 너무 좋아서 함께 하기를 멈추지 못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이 모든 만남과 자극이 서서히 멈추고 가만히 있게 되다 보니 마치 매우 혼탁했던 흙탕물의 부유물이 가라앉아 물이 맑아지듯 나의 지금이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고 했었나.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내 나이'였다. 30대가 된 이후로는 30대로 퉁치며 한 살 한 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았다. 육아에 올인 중인 동갑 친구들 덕분에 사회에서 나와 놀아주는 친구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어쩌다 나이를 밝히기라도 하면 '와 너무 동안이세요' 하는 말에 내심 흡족해하면서 그 친구들의 열정을 닮으려 했고 그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계속 보조를 맞춰 달리고 싶었다.
그러다 코로나 덕분에 함께 달리는 친구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혼자서 트랙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혼자 내 속도로 걷다 보니 정말 내가 집중해야 할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해보면 어느덧 8년 차 직장인이다. 그런데도 내 고민은 늘 사회초년생의 고민에 머물러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고 공감하면서 정작 내 위치와 상황에서 해야 하는 고민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내가 쌓아 온 시간과 경력은 너무 보잘것없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36살'이라는 숫자의 크기를 문득 실감하게 되었다.
코로나는 '가족'에 대한 생각도 바꿔 놓았다. 일도 집에서 하고 휴일에도 집에만 머무르다 보니 아마도 성인이 되고 나서 부모님과 보낸 시간이 가장 많은 해가 올해가 아닐까 싶다. 친구들이 채워주던 시간과 공간을 가족이 대신한 한 해였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불가능해지니 가족이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소중한 '내 가족'을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도 더욱 명확해졌다. 늘 곁에 있던 가족이었는데 가만있어보니 이제야 그 가치가 제대로 보인다. 물론 함께하는 시간만큼 갈등도 만만치가 않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 선생님도 가족은 지옥이자 구원이라고 하셨는데 가치가 높은만큼 대가도 톡톡히 치르고 있다. 집안에 종일 함께 있어도 편안~한 사람과 함께 살면 좋겠다는 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을 '했다' 보다는 '하지 못함'으로 깨닫는 것이 많은 한해였다. 코로나를 핑계 삼아 멈춰 있는 것이 허락되는 한해 이기도 했다. 올해는 이렇게 위로하며 보내줘야겠다. 새해가 되어도 당장은 상황이 그리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되지만 내년에는 올해 찾은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탐구해 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는 더 이상 변수가 아닌 상수로 세팅해 두고 업그레이드 버전의 감염병 시국을 맞이해야겠지. 그럼에도 아무튼 Happy New Year!!